Simple Life2018.02.17 10:59

그해 겨울
미국에서의 첫번째 겨울이었다. 영어도 잘 못하고 친구도 없고 하던 중에 친해진 형을 따라 스노우보드에 입문하게 됐다. 난 원래 스키어지만 장비와 옷은 한국에 두고 왔기 때문에 새로 장만해야 할 처지였다. 이왕 새로 갖춰야 하는데 새로운 종목에 도전해보는게 좋은 생각이기도 했다. 게다가 형님께서 가르쳐주신다고도 하니까 이 기회를 놓치기도 어려웠다.

내가 스키를 배울 때 헤르만 마이어가 이상적인 모델이었듯이, 스노우보드를 배우는데 최고의 선수를 따라해봐야 하지 않겠나. 바로 그 선수는 숀 화이트. 난 오클리에서 숀 화이트 시그너처 고글을 봤고, 두번 생각하지 않고 샀다.

다음 겨울, 밴쿠버 동계올림픽이 있었다. 카메라는 겨울 최고 스타를 비추고, 난 몸푸는 그를 보고는 얼어붙었다. 숀 화이트가 쓴 것은 숀 화이트 시그너처 고글이 아니었다. 오클리는 오클리였는데, 색깔이랑 렌즈가 달랐다. 굳이 가격으로 말할 것 같으면, 훨씬 싼 기본적인 렌즈였고, 단일 색상 프레임이었다.

뭐랄까 참… 산뜻하게 엿먹은 기분이라면 설명이 될까. 숀 화이트는 고글이 어쨌거나 말거나, 간지 철철 넘치는 모습으로 하이프이프를 내려갔다. 난 그 모습을 넋놓고 바라볼 수 밖에. 하기사, 무슨 최첨단 기능 따위 고글에 무슨 상관이람. 그런것 사용한다고 기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닌데, 이 당연한 걸 지금도 가끔 헷갈린다.

미국인들이 올림픽을 즐기는 방법
2004년 동계 올림픽에서 숀 화이트는 여전히 압도적인 기량을 뽐냈다. 근데 웬걸, final round에서는 평소보다 영 못했고, 메달도 못땄다. 그 올림픽 최고의 퍼포먼스는 예선에서의 숀 화이트였다. 그정도만 했어도 우승을 했을텐데 본인으로써도 퍽이나 아쉬웠겠지.

경기가 끝난 후에 인터뷰 하는 모습을 봤다.
“3연패를 노리고 있었을텐데 아쉽지 않나요?”
“저는 4연패를 노리고 있었어요. … 오늘은 날이 아니었나보죠 (It wasn’t my day).”
상대를 의연하게 인정하고, 본인의 불운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거나 격한 감정을 쏟아내지 않았다. 쿨했다. 너무나 쿨했다.

또하나 내가 인상적으로 느낀 것이 미국인들이 올림픽을 즐기는 방식이었다. 정상급 선수들이 총출동해서 펼치는 최고의 퍼포먼스를 볼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물론 nationality가 약간은 개입해 있긴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본인의 관심이다. 관심도 없는 종목에 단지 본인 국적의 선수가 출전한다는 사실만으로 갑자기 흥분하는 사람은 못봤다. 본인 국적의 선수가 금메달을 따면 나라가 흥하고, 혹시라도 미끄러지면 본인이 중요한 시험이라도 망친 듯 오버하는 모습 역시 없다. 왜냐하면, 담백하게도,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선수가 메달을 따면 그에게 좋은 일이지, 나하고는 별 상관 없는 일이다.

난 이 사실을 어릴 때 알았다. 롯데 자이언츠가 우승을 했는데도, 내가 마주해야 할 비루한 일상은 그대로였다. 내가 왜 그리 목놓아 응원을 했는지 회의가 들었다. 그런데 내가 이런 태도를 한국 사람들 앞에서 보이기란 쉽지 않다. 한국인이라면 응당 내가 룰도 잘 모르는 종목의 처음 보는 선수를 응원해야만 한다.

이런 미국 사람들 사이에서도 숀 화이트가 메달을 못딴 이야기는 화제였다. 거의 유일하게 점심시간에 수다 떨다 나온 올림픽 이야기였다. 숀 화이트가 워낙 대단한 스타이기도 하고, 스노우보드 또한 가장 인기 있는 종목 중 하나라 그런 것 같다. 그들 역시 쿨하게 받아들이더라. 최고의 선수인건 분명하지만 그날 운이 좀 없었나보지 하고 말더라고. 혹여 한국의 빙상스타에게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면 분위기는 퍽이나 달랐겠지.

역시 대단한 선수
지난 화요일, 평창발 뉴스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또다시 숀 화이트가 우승을 했단다. 라이브로 봤다면 얼마나 흥분됐을까. 뒤늦게 찾아본 영상을 보니, 이건 뭐 금메달일 수 밖에 없더라. 여유와 긴장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리고 비장함. 해설자의 말대로 the biggest run in his life였다. 마지막 착지를 마치고 포효하는 모습을 보니 본인도 알았던 것 같다. 지난 올림픽에서 마지막 연기를 마치고 초조해하던 모습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금메달은 금메달이고, 역사상 최고의 epic run이 아니었을까 싶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마침 하프파이프 상태도 받쳐줬기 때문에 과감히 최고의 기술을 시도했던 것이지 않았을까. 소치 올림픽 때는 하프파이프 상태가 엉망이었다고 한다. 꼼꼼한 한국 사람들이 이 국가적인 행사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치뤄낼지는 짐작이 간다. 결과적으로 하프파이프가 완벽이란다. 이건 해설자들도 칭찬하더라. 최고의 멍석이 깔렸기 때문에 초일류 선수가 자신의 기량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었겠지.

환희의 눈물을 쏟아내는 그를 보니 그가 느끼고 있을 감정의 크기가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걸어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겠지. 제작년 르브론 제임스가 우승했을 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내 심장과 눈물 피와 땀, 모든 것을 바쳤다.”

아 썅 진짜 멋있었다. 싸나이가 이렇게 함 살아봐야 되는건데. 난 무엇에 열정을 불살라봤나. 몇개 생각이 나긴 하는데 어디다 자랑할만한 건 하나도 없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멀쩡한 걸 해봐야 할텐데.

Posted by Markowitz
Simple Life2018.02.13 17:01

처음에 미국 왔을 때는 병원에 안갔다. 유학생 시절에는 아무것도 몰랐고, 회사를 다니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랬다. 미국 의료비가 살벌하다는 소리에 겁먹어서 병원에 가면 바로 파산하는 줄 알았다.

어느날 일년에 두번 clean up(한국에서는 스케일링이라고 부르던 바로 그것)과 검사가 무료라는 걸 알았다. 회사 보험 덕에 치료비도 그렇게 비싸지 않았다. 그리하여 집 근처 치과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나. 이제 누가 미국 치과에 대해 물어보면 뭘 기대할지 말해줄 수 있다. 한국과 어떻게 다른지도 좀 알게 된 것 같고.

한문장으로 말하면, 한국보다 비용은 비싸나 양질의 서비스를 마음 편하게 받을 수 있다.

내 이력이 제대로 관리되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이것은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는데다 항상 예약을 해야 한다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모든 진료가 예약제이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아무 치과에 가는 일이 없다. 당장 가고 싶어도, 운이 좋지 않은 이상, 받아주는 곳이 거의 없다. 내 이력을 다 알고 있는 곳을 두고 다른 곳에 갈 이유도 없고. 이 때문에 치과에 오는 환자들은 뜨내기 손님이 아니라 단골들이다. 이런 환경 덕에 치과에서는 좀 시야를 멀리 두고 관리를 해주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치과 가겠다고 마음 먹으면 대충 회사 근처로 찾아갔다. 그냥 가도 진료가 되고, 예약도 몇시간 안으로 된다. 이러니 내 치과를 정해두고 다니는게 아니라 그냥 아무데다 막 다니는 사람이 많을게다. 나도 그랬고. 치과에 뜨내기 손님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이 사람이 6개월, 1년 후에도 온다는 보장이 없으니 만났을 때, 진료는 대충 하고, 최대한 뜯어먹고자 달려드는 치과를 많이 봤다. 치과의사인 친구와 크로스체크로 알아낸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한국에서 치과에 가기가 워낙 편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과 비교하면 당연히 비용은 비싸다. 허나 서비스도 월등히 좋다. 스케일링이 대표적이다. 한국에서 받던걸 생각했는데, 이건 뭐 무슨 방망이 깎는 노인인줄 알았다. 한국에서 친한 친구한테서 받아도 이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그 친구의 두배나 시간을 써서 구석구석 다 긁어주더라. 좀 번거러워도 가서 받을만 하다. 정기적으로 방문하는데다, 나에게 시간도 더 써주고, 이력 관리까지 완벽하다. 내 이빨이 한국에서보다 잘 관리될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한국 치과도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쉽게도 한국에 적용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 진료 시스템의 장점을 뜯어보면 검사를 정기적으로 받는데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내가 부담없이 check up을 가는 이유는 보험사에서 이 비용을 대주기 때문이고, 이 보험은 회사에서 들어준거다. 한국의 건강보험이 이 비싼 검사와 서비스를 무료로 해주지 않는 한, 난 한국에서 살아도 치과에 정기적으로 안갈거다. 만약 치과에서 손해를 좀 감수하고, 스케일링만 받으러 온 사람에게 엑스레이도 찍고, 온갖 앵글에서 사진도 다 찍어서 관리를 해준다면 갈 것 같다. 그런데 이 생각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모르겠다. 미국에서는 돈을 받고 해주는 걸 거의 공짜로 해줘야 하는건데.

누군가 해준 얘기가 귓가에 맴돈다.

“미국은 최고의 의료시스템을 갖고 있다. 돈만 있으면”

Posted by Markowitz
Simple Life2018.01.21 14:23

난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보는 편이었던 것 같다. 미국에 오기 전까지를 돌아보면, 입시 준비에 매달려야 했던 고등학교 시절을 제외하고는 항상 책을 읽으면서 지냈다. 대학교 시절 어떤 사람이 읽어보라며 던져준 책이 한비야씨의 여행기였다.

난 그 책을 끝내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한비야 책에 있는 에피소드 이야기를 할 때 보면 아는 내용이 많은 것으로 봐서 제법 많이 읽다 덮은 것 같다. 그러니 내가 그 여행기에 대해서 내 감상을 말해볼 자격은 있다고 생각한다.

한비야씨의 책은 흥미로웠다. 내 짧은 인생에서 경험해본 여행과는 차원이 달랐으니. 그러나 어느 순간 이 책의 내용들이 진실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는 듯 했다. PC 통신에 돌아다니던 글과 비슷해 보였다. 당시 PC 통신에는 심한 과장 또는 허위가 섞여 들어간 글들이 많았다. 뭐 지금도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많은 글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아마추어들이 남들 이목을 끌어보려고 하는 짓이란 게 뭐 비슷하겠지. 잘 훈련된 소설가들의 글과는 차이가 많이 난다. 내가 정성적이나 정량적으로 그런 패턴을 정리해본 적은 없지만, 한비야씨의 글에서 그런 걸 본 것 같다.

그 후로는 책에 몰입이 되지 않았다. 내가 이걸 왜 읽고 있어야 하는지 정당화할 방법이 없었다.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되니 뭔가를 배우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삶의 지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글솜씨가 감탄할만큼 뛰어난 것도 아니니. 다른 책들 대신 이걸 들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책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잊었다. 그런 식으로 잊은 수많은 다른 책들처럼 말이다.

한두해나 지났을까. 한비야씨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걸 봤다. 그제서야 그때 읽다 덮은 책을 기억해냈다. 신기했지만, 잘못된 일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고, 알맹이 없는 베스트셀러 한두번 본 것도 아니니. 그런데 한비야씨 개인의 인기가 덩달아 높아지더니, 나같은, 젊은이들의 멘토 비슷한 대접을 받더라. 아직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제대로 몰랐던 시절이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일요일 아침, 아직 아기가 깨기 전, 일찍 일어나기 싫어서 뒹굴거리며 한국 뉴스를 보다 한비야씨 소식을 봤다. 현재 어느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하시며 지내시는 모양이다. 거기서 만난 분과 결혼을 하신다네. 뭐 나름 성공한 삶인 것 같다. 내가 결혼했을 때는 뭐.. 뉴스는 커녕, 왜이리 소리소문 없이 결혼했냐 소리까지 들었는데. 사람이 사는 방법은 한두가지가 아니고 삶이 평가되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연못에 던져진 짱돌마냥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 같긴 하다. 덕분에 옛날 생각 좀 해봤다.

Posted by Markowit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