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mple Life

천재, 그리고 그의 모범

Markowitz 2021. 11. 30. 06:35

원래 유명한데다 아주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나와 개인적인 접점이야 거의 없지만, 있다고 해봐야 'XXX씨 이거 가져다 쓰세요.' '네 감사합니다' 수준의 이메일 교환해 본 게 다이니 날 기억하고 있을 리는 절대 없고, 잘 아는 주변인들은 제법 있다. 그들에게서 들려오는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냥 천재다. 그리고 객관적인 성취로 이미 그걸 증명했고 말이지.

그 사람의 인터뷰를 봤는데 본인이 크게 성장한 계기를 주었던 어느 사람을 언급하더라. 그 분 이야기를 한 게 처음도 아니니까 본인이 좋은 쪽으로 큰 영향을 받은 게 사실인 것 같다. 나도 그 이야기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분은 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한 때 내 상사셨던 Y박사님이다.

내 상사시긴 했어도 인사적인 관리만 받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일을 같이 많이 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드물게 훌륭한 분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능력과 인품 이 모든 면에서 말이다. 그 분을 생각하면 먼저 특유의 차분함이 떠오른다. 안타깝게도 그 분은 나를 그리 높게 평가하진 않으셨다. 같이 일을 많이 하지 않아서 그런가 싶다가도 그 얼마 안되는 일을 같이 하면서도 그렇게 똘똘한 인상은 못드린 것 같은데 그건 뭐...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내가 그냥 그런 거지.

그 분을 직접 뵌 것은 미국 오기 전 날이 마지막이다. 내가 유학 가는 건 이미 아시고 계셨고, 난 인사만 드린 것인데. 내 앞날의 행운을 빌어주셨다. 따로 연락을 드린 적도 없고 페이스북 같은 것도 안하시고 해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모르다가 다른 분을 통해서 소식을 전해들었다.

경영진이 그 분께 뭔 프로젝트를 시켰는데, 이게 뭐 전형적인 pet project인지라 일은 물론 그거 하는 사람까지도 말아먹을 게 뻔했다. 똥오줌 못가리고 그걸 넙죽 받아서 할 수도 있겠고, 핑계 대면서 시간만 질질 끌 수도 있겠고, 그냥 눈치 봐서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튈 수도 있다. 그 분은 그러시지 않았다. 프로젝트를 거부한 것이다. 당연히 경영진에서는 안좋아하지. 본인의 판단에는 이건 안 될 일이었고, 경영진에게 미움받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게 진짜 엔지니어로서의 자존심이 아닐까.

통제 불능의 똥고집 뭐 이런 게 아니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 판단을 드러내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본인의 직을 걸고 용기를 내신 거였고, 결국 그 조직에서 나와야만 했다. 결국 누가 옳았는지, 누가 똥고집을 피운 건지는 머지 않아 밝혀졌다. 때론 밖에서 볼 때는 당연해 보여도 조직 안에서 그렇게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가 않다. 좀 안타까운 결말이긴 한데, 그 정도의 능력자는 찾기도 쉽지 않고 노리고 있는 곳도 많다. 하지만 애초에 경영진이 그 분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를 돌아봤으면 좋았을텐데 뭐... 이제 다 지난 일이고, 원래 제 정신 붙은 사람은 제 정신 안붙은 사람 밑에서 일 못한다. 언젠가는 저렇게 터질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분과 좀 더 가까이서 일을 많이 하고 더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는 게 아쉽다. 언젠가 다시 같이 일을 할 기회가 있을지. 한국에 계시니까 현실적인 바램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사실은 나도 나름 역량이란 게 있는 사람이라고 어필해보고 싶기도 하고. 그 분을 좋은 본보기로 여기는 사람이 그 유명한 천재 뿐 아니라 나 같이 미미한 사람도 있다는 걸 아실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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