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블랑카
미국 역사상 최고 걸작 영화 중 하나라는데 드디어 봤다. 너무 집에만 틀여박혀 있어서 그런지 영어 실력이 줄어든 느낌인데, 대사가 잘 들리지 않아서 애먹었다. 내가 지금 봐도 참 잘 만든 영화다. 너무 캐릭터와 스토리가 전형적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데, 그건 이 영화를 흉내낸 다른 영화들이 숱하게 있어 왔고, 그것들의 세례를 받으면서 살아왔으니 그렇게 느낀 것일 뿐이다. 예전에 어느 영화 배우의 인터뷰를 현장에서 지켜본 적이 있다. 영화를 선택할 때 시나리오가 최우선이라고 많이들 생각하는데, 사실은 제작자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똑같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갖고 영화를 만들어도 어떻게 실행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의 질이 천지차이라며 말이지. 뭐든 실행이 제일 중요한 거다. 이런 점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시나리오가 훌륭하지만 전형적이라고 느낄 여지는 충분히 있으나 실행이 완벽한 점에는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또 하나 주인공의 매력이 없이는 멜로 영화는 성립되기 어렵다. 난 남자다보니 여자 주인공의 얼굴에 관심이 안 갈 수가 없는데, 정말 대단한 미인이더라. 예전에 소피 마르소 주연의 'You call it love'라는 영화를 봤던 때가 떠올랐다. 정말 별 것 없는 영화다. 그런데도 영화가 굴러가고 나를 앉혀놓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소피 마르소의 미모 때문이었다. 사소한 일로 주인공 커플이 틀어졌을 때 참 내가 가슴이 다 아리고 안타깝고 했는데 그 정도로 몰입을 했던 게 여주인공의 미모를 제외하면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 형편 없는 영화조차 여주인공의 미모가 캐리했는데, 탄탄한 시나리오와 완벽한 실행, 거기다 여주인공의 미모까지 더하니 정말 어후.. 몰입감이 장난 아니었다.
너무 몰입을 해서 그런지, 영화가 끝나고 나서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뭐 이런 생각도 했다. 아니 그냥 지난 일 생각 좀 했다고 해야겠다. 영문도 모른 채 잠적해버린 옛 사랑이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다라. 사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가장 오랫 동안 좋아한 사람인데, 뭐 그녀가 전화 번호를 바꾸고 연락을 끊어버렸다. 둘 사이에 특별히 안좋은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관계가 냉랭해진 참에 내 인생은 급격히 말렸고, 그 와중에 이런 일이 있었던 게지. 지금 돌아봐도 내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그 때 난 그냥 담담하게 마지막을 받아들였다. 체념하듯이 말이다. 둘 사이는 이렇게 끝났다. 아니 끝났어야 했다.
내가 심신을 추슬러가던 어느 여름 날이었다. 모르는 번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막 제대한 친구겠거니 하고 무심코 받은 전화에서 난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 꿈에서라도 다시 듣길 원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난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안고 약속 장소로 갔다. 그녀의 표정은 무거워 보였지만, 그저 다시 볼 수 있어서 기뻤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꺼림칙한 기분이 올라왔다. 뭔가 체한 것 같은 불편함, 이게 가시지를 않았다.
나는 묻고 싶었다. 왜 그랬냐고... 왜 그런 식으로 떠냤냐고 물었다. 그녀가 뭔가 말을 하긴 했는데, 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거 말고 진짜 이유를 알려달라고, 지금에 와서 왜 다시 나타난 거냐고 묻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만났지만, 우린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많은 대화는 허공으로 흩어졌을 뿐이고, 가식이나 잔재주가 섞이지 않은 말조차 진심을 담보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매번 다소 떨떠름한 여운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우린 서로를 붙잡지 않았다.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였다. 자신의 결혼 소식을 알려왔다. 그 해 가을이었다. 그녀는 결혼식을 올렸고, 나는 회사 야유회를 갔다. 그 전화를 끝으로 난 다시 그녀로부터 들을 수 없었다.
후일담이라고 해야할까. 사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몰랐다. 헌데 그 사건 이후로 생애 최악의 여자친구들을 연달아 만나기 시작한 걸 보면,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저 난 Rick과 같은 멋진 남자가 아니었고, 이런 상황을 감당할만한 아량도 없었다. 그녀에게 원망을 쏟아놓은 적은 없지만, 서운함만은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가 나를 그 정도로 좋아한 것도 아니고 말이지. 진심을 털어놓는 것도, 솔직한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또 그걸 믿어주는 건 다른 문제이고. 참 어렵다 어려워.
뭐 그냥 훌륭한 영화 하나 봤고, 덕분에 옛날 생각이 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