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mple Life

감동은 컨텍스트에서 나온다

Markowitz 2023. 6. 30. 07:19

22년 전에 난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학교를 자퇴하고 유럽 여행을 갔다.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던 중에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했으니

“한국 사람들의 유럽 배낭 여행은 잘못됐다. 이태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크게 잘못된거다.”

나도 맞장구를 쳤다. 다른 동네는 그럭저럭 재밌었는데 이태리만은 도저히 즐길 수가 없었다. 뭐 오래 전에 만든 건물이나 미술품은 많지. 그런데 그냥 보고 ‘우와 옛날에 이런 걸 만들었구나’ 이러고 나면 그 이상으로 할 게 없다. 시발 우리가 뭐 사진으로 본 게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러 여기까지 왔나. 스위스 가서 멋진 경치를 본다면 여기 저기 둘러보고 걸어보고 하면서 새로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데, 그냥 광장의 분수대, 누군지도 모르는 조각상 이런 건 뭐... 그러다보니 그냥 가서 사진 찍고 돌아 나오기의 연속이었다. 우리가 옛날 유럽 미술과 건축에 대해서 뭘 좀 알았다면 좀 즐길 수 있었겠지. 개인적인 애정이나 사연이라도 있었으면 좀 다르게 보였을 거다. 그런데 우리 일행은 전원 이공계 남자들이었으니 한계가 뻔했다.

게다가 날씨는 오지게 더워서 낮엔 뭘 할 수가 없었다. 호텔도, 우리가 싸구려만 찾아다니긴 모든 도시에서 마찬가지였지만, 이태리 호텔이 특출나게 후졌다. 게다가 사기꾼 많고 치안 안 좋고. 뭐 좋게 봐줄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베네치아가 좀 특이하게 생겨서 재밌었다는 점 빼고는 좋은 기억 하나 없이 이태리를 떴고, 마침 다음 행선지는 안락하고 아름다운 스위스였기 때문에 더 심하게 대비되어 안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그리하여 내 생애에 이태리 가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 또 다녀왔다. 온 가족을 대동하고, 심지어 이 어린 애들까지 데리고 말이다. 결혼식 참석만 하고 그 근처에서 쉬다 오고 싶었는데 마누라 때문에 피렌체와 로마까지 찍었다. 나이 좀 먹었으니 다시 본 로마가 아름답게 보이기는 개뿔 진짜 시발 예상보다 더 별로였다. 심지어 우리 마누라까지 욕을 하더라. 왜냐하면 저 컨택스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뭘 봐도 그냥 사진 한 장 찍으면 할 일이 없는 게지.

예상을 벗어난 지점도 꽤 컸는데, 날씨가 너무나 더웠다. 8월 초의 로마, 피렌체가 더운 건 이미 알고 있었지. 근데 시발 6월 중순에도 섭씨 34도까지 올라가더라. 햇볕은 또 얼마나 따가운지 오전 10시만 넘어도 뭘 할 수가 없었다. 애들은 햇볕 아래서는 세 발짝도 움직이기 어려워 했다. 게다가 코비드 끝나서 그런지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진짜 로마와 피렌체는 수용 한계를 훨씬 넘어선 수의 관광객이 돌아다니고 있는게 확실하다. 사람한테 낑겨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겠더라. 애들도 맨날 호텔 방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칭얼대고. 이태리라는 데가 사실 땡볕 아래서 걸어다니면서 구경하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다. 그 구경거리를 좋아하든 아니든 말이다. 근데 이게 안 되니까 시발 뭐… 그나마 실내에서 구경하는데가 바티칸 박물관하고 시스틴 성당인데, 에어컨도 제대로 안 틀어주대. 시발 미켈란젤로인지 지랄인지… 진짜 탈진하는 줄 알았다. 여기 오기 전에는 제발 애들이 기억만 해줘라 이랬는데, 기억을 해도 뭐 좋은 기억으로는 안 남았을 것 같다.

로마하고 피렌체 여행은 뭐 망했다고 치더라도, 이태리 북부는 좋았다. 좀 더워서 그렇지 애들이 베니스는 재밌어 했고, 저기 북쪽 국경 근처의 국립공원도 아름다웠다.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같은 알프스 산자락이라 그런지 스위스에서 본 것들과 다르지 않더라. 다만 가격은 훨씬 쌌다. 음식이나 보트나. 헌데 스위스의 인터라켄이나 루째른 같은 곳들은 기차로도 갈 수 있는데 우리가 간 동네는 차를 빌려서 가야 하기 때문에 스위스보다 딱히 효율적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거기서 본 사람들도 거의 다 독일이나 이태리 사람들이었고 한국인 중국인 단체 관광객은 전혀 없었으니. 하지만 내가 이태리에 다시 온다면 아마도 여기로 올 것이다. 아름답기도 아름답거니와 별로 붐비지도 않고 고도가 높아서 좀 덜 더운 것도 이유이다.

로마하고 피렌체에서의 여행이 존나 고생스럽긴 했는데, 좋은 점도 있었다. 마냥 더위에 쫓겨 들어간 레스토랑이 알고보니 오드리 햅번, 로버트 드 니로, 레오다르도 디카프리오 형님까지 방문했던 명소였다. 운이 좋아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런 우연한 발견이 여행의 즐거움이지. 마누라는 이번 여행은 진짜 먹는 걸로 조진 휴가라고 했다.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소박한 식당부터 저런 유명 레스토랑까지, 거의 모든 음식이 훌륭했다. 와인도 좋았는데 특히 베로나 근처의 어느 와이너리에서 맛 본 샤도네이는 놀랄만큼 맛있었다. 만약 내가 22년 전에도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면, 이태리에 대한 기억이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여기서 시간을 좀 보내고 했으니까 약간의 컨텍스트는 만들어진 것 같다. 여기서 즐겼던 음식과 와인, 아이들과 온천에서 놀던 기억. 농장에서 체리와 살구를 따먹던 일도. 거기다 이제 로마의 Navona 광장이라고 하면 여기서 둘째가 똥을 싼 일이 떠오르겠지. 시카고에서는 생각도 안 하고 사는 모기한테 오지게 뜯긴 것도 추억이라면 추억이다. 그래도 난 절대 여름에는 이태리에 가지 않겠지만 말이다.

근데 생각을 해보니 음식 맛있고 경치 아름다운 동네면 그냥 밴쿠버를 가는 게 더 낫지 않나? 친한 친구도 거기 살고. 거긴 아시아 음식도 맛있잖아.

피렌체 거리에 넘쳐나는 옛날 조각상, 그 조각상들로 만든 기념품을 보며 첫째가 그랬다.
“아빠 왜 이 사람들 다 옷을 벗고 있어?”
내가 대답했지.
“이태리가 더워서 그래.”
참으로 적절하지 않은가?
또 하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에 대한 우리 첫째의 감상은 그냥 booty butt일 뿐이더라.

우리 마누라는 애들한테, 이렇게 비싼 여행을 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설교를 늘어놓더라. 아니 이제 겨우 4년하고 6년 산 애들한테 뭐라는거야? 생각해보면 내가 어릴 때도 부모님하고 차 타고 지리산 같은 데 가서 비슷한 소릴 들었다. 아마도 부모님들은 어릴 때 그런 데 가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면 대단한 호사였겠지. 그냥 우리 부모님이 나한테 했던 거나 내가 우리 애들한테 하는 거나 비슷한 것 같다. 다만 지리산이 알프스로, 또 불국사가 시스틴 성당으로 업그레이드 된 것일 뿐이지. 우리 애들이 내 나이가 되면 지중해 대신 고요의 바다가 되려나. 솔직히 그런 여행이란 게 우리 부모님이 원해서 간 것일 뿐이고 내가 대단한 감흥을 받은 기억도 없다. 단지 차에 오래 타고 있어서 힘들었다. 이런 것들도 지금 우리 상황이랑 비슷하네. 역시 사람 사는 건 뭐 다 똑같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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