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은 당황스런 후속작
내가 옛날에 학교 다닐 때 글레디에이터란 영화가 나왔다. 압도적인 영화였지. 그 해에 와호장룡도 나왔는데, 와호장룡은 그냥 새끼 호랑이/용이다라며 글레디에이터를 극찬하는 사람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었다.
후속편이 나왔길래 찾아서 봤지. 이 영화는 신 별로 끊어서 보면 괜찮다. 화면은 끝내주게 뽑아주고 그 안의 인물 묘사도 훌륭하다. 근데 시발 이걸 다 이어놓으니 전개가 너무나 당황스럽네.
그래도 이 영화의 미덕을 먼저 꼽아보면 악역이 없다는 게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면 그냥 나쁜 새끼가 있을 때도 있지만, 딱히 누가 착하고 나쁜 건 없는데 추구하는 방향이 달라서 갈등이 생기는 일도 흔하잖아. 1편에서의 악역인 콤모두스는 그냥 나쁜 새끼였지. 근데 2편의 악당 포지션에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이 사람은 로마를 끝장내려는 인물이니까 로마를 재건하려는 주인공에 맞서고 따라서 악역 비슷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인데, 난 오히려 이 인물에 공감이 갔다. 로마는 망하게 되어 있고 자신은 그냥 약간의 푸시만 줄 뿐이라는 데서 나는 카이사르가 떠올랐다.
카이사르는 공화정으로써의 로마를 끝장내고 황제정의 시대를 열었다. 로마의 정체성이 공화정 체제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카이사르는 악당이지. 하지만, 로마는 변했다. 옛날에 처음 그 정치 체제를 도입했을 때와는 로마에 가용한 자원, 맞딱드린 도전이 다 바뀐 거다. 그러니 원로원 중심으로 두 명의 집정관 있고 뭐 이 체제는 그 당시에는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이 아니었던 것이지. 따라서 기존의 체제로 현재의 첼린지를 헤쳐나가려 하는 시도, 그러니까 공화정을 어떻게 고쳐보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카이사르가 나타나서 새 시대를 연 거지. 덕분에 로마는 새로운 생명을 얻어서 제국을 연장해갈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시대도 비슷했던 것 같다. 황제정의 로마가 내리막을 타고 있었지. 이 상황에 기존의 정치 체제는 그대로 두고 나쁜 새끼들만 좀 쳐내서 다시 옛날처럼 복구하겠다는 아이디어는 사실 꿈 같은 소리다. 좀 고쳐봐야 다시 물 새고 난리가 날텐데, 지붕 좀 땜빵하기보다 대대적인 리모델링이나 재건축을 해야지. 그런 면에서 난 주인공보다는 마크리누스가 옳다고 생각하고, 영화의 결말이 복합적으로 느껴졌다.
근데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주인공이다. 처음에는 로마에 의해 모든 것을 잃고 노예가 된 전사인데, 갑자기 로마의 숨겨진 왕자가 된다. 심지어 본인은 그 사실을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 관객들에게만 갑자기 알려진 거지. 그리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된다. 본인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감정, 로마에 대한 감정 모두 다 말이다. 로마의 모든 군대를 다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하더니 갑자기 그들과 로마를 재건해보자며 외치는 게 말이 되나.
“로마의 숨겨진 왕자가 로마를 재건하기 위해 나타난다.” 기본 줄거리를 이렇게 잡았으면 이래 가는 게 맞고 “로마의 군대에 짓밟힌 한 사나이가 그 분노를 연료로 콜로세움에 들어간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면 그대로 하면 된다. 근데 전혀 다른 이야기 둘을 억지로 한 인물에 우겨박으니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를 보면 한번씩 스토리가 이게 왜 이러나 싶을 때가 있긴 하다. 그런데 이렇게 큰 스케일로 아예 그냥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건 나는 처음 본다. 근데 앞 뒤를 따로 떼놓고 보면 상당히 고퀄리티인 게 진짜 또 희안한 점이다.
그래서 대놓고 훌륭하다고 말하기도, 아니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영화네. 그나마 러닝 타임 동안 즐길 수는 있었으니 괜찮은 영화라고 해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