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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 Life

내 현실

지난 인터뷰에서 떨어진 것이 나름 꽤 큰 충격이었다. 내가 이동네에서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사살시켜준 고마운 이벤트였지. 이 열패감도 현실감각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하련다. 다만 문제라면 내가 충격 같은걸 받으면 그게 참 오래가는 스타일이란 거지.

한국에서 있다가 여기 오면서 크게 달라진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의 태도다. 난 고작 말 제대로 못하는 외국인 학생일 뿐이다. 한국에서는 난 그래도 학생 때에는 공부 잘하고 회사에선 일 잘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굳이 이상한 짓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날 함부로 대하는 일이 드물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어딜 가나 미친놈들 몇놈씩은 꼭 있고 그 미친놈들이 나만 무는 것도 아니니 그러려니 했다. 나만 제대로 하면 별 문제 없었고, 나만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진심으로 대한다면 험한 꼴 당할 일도, 비아냥거림을 당할 일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여기선 다르다. 내가 뭔 짓을 했다고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헷갈리는 일들이 너무 많다. 처음엔 환경이 삭막하니 그러는가 했는데, 내가 다녔던 직장이 오히려 더 fierce competition이 횡횡하는 곳이었다. 문화 차이도 있을 것이고, 환경 차이도 있겠지. 그리고 여기 한국사람들조차 내가 지금껏 만나왔던 사람들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내가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한테 지랄을 해도 별 탈이 안생기기 때문에 그런다는 거다. 반면 잘해줘봐야 내가 줄 수 있는 건 없지. 비참해도 이게 지금 내 현실이다.

이것을 인정하기는 쉽지만, 이것을 알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그전엔 문화차이 정도로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이를테면, 내가 뭘 잘못한건지, 이 사람들이 내게 뭘 기대하는 건지 알아내려고 했다. 물론 이러한 어프로치가 어느정도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긴 했다. 하지만, 뭔 사실을 파악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큰 그림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 그림은 내 현실, 문화 차이는 부차적인 것일 뿐이지.

기껏 이걸 알아내는데 오래 걸린 이유는 난 내가 뭔 권한이 있다고 유세를 떨어본 적이 거의 없어서이다. 난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고 그렇게 행동해 왔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사람들을 경멸하고 내 자신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정말 노력했다. 기분 나쁠 때 괜한 사람에게 시비걸어서 박살낸 적이 있긴 하다. 누구나 실수는 하니까. 그래도 남에게 항상 잘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그랬고 날 그렇게 봤다. 안그런 사람이 간혹 있었지만, 어디에나 있는 미친놈 정도로 취급했다. 그래서 여기 와서 일어나는 일들, 내 상황보다는 그런 사람들의 행동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이런 놈들한테도 무시를 당하고 있구나 하는 기분 역시 참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라 당황스럽기만 했다.

단순히 인터뷰 떨어진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이런 내 현실... 그걸 마주하면서 느끼는 무력감이지.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로 계속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 있는 나름 베스트 프랜드란 애가 갑자기 추석선물이라면서 mp3p를 사준댄다. 어깨 축 늘어뜨리고 똥씹은 표정으로 책만 보고 있을 내가 눈에 선하대나 뭐래나. 지난 여름방학 때 옷이랑 같이 빨아버려서 전사한 mp3p 대용이란다. 이거 받고 힘내서 공부 계속 하라는데 진짜 힘이 좀 되긴 된다. 아 내가 이렇게 유치한 인간이었나.

아무튼 이제 힘을 좀 내야겠다. 오늘은 브라우니도 하나 사먹었고, 지난주엔 파티도 했고, 새로 기타 줄도 주문했다. 참 별짓을 다 해보는데도 잘 안되는데 친구가 mp3p까지 사줬으니 그게 도착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기운을 차려봐야겠다. 내가 이 친구한테 뭘 받아본게 진짜 얼마 없는데 내가 얼마나 안되어보였으면 mp3p까지 사줄까. 예전에 유럽갔을 때 콜렉트콜 걸었더니 돈나온다고 끊어버리던 놈한테, 물론 본인은 실수라고 했지만, 이런 선물을 받다니 정말 내가 오래 살긴 살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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