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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 Life

가볍디 가벼운 현대인의 인간 관계

집에서 기차역까지 걸어갈 때는 난 귀에 아무 것도 끼지 않는다. 보통 이른 새벽 시간이라서 마주치는 사람이 없다. 대신 이슬 맺힌 잔디와 나무를 보고 새소리, 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천천히 걷는다. 이러고 나면 머릿 속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다운타운 시카고에서 길을 걸을 때는 조금 다르다. 항상 귀에는 이어팟, 눈에는 선글라스를 낀다. 처음에는 그냥 도시의 소음보다 음악이 좋고 눈이 부셔서였는데 이제 마냥 그런 이유는 아니게 되었다. 이렇게 다니면 잡상인과 눈이 마주칠 걱정도 없고, 구걸하는 사람이 말을 걸어오는 것도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하고 내가 별 상관이 없는 것도 사실, 그 사람들과 엮여서 좋은 일 생기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그 사람들을 최대한 무시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다. 허나 눈이 마주치거나 나를 부르면 그냥 넘어가기 힘들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거기 있는 것이지. 에어팟과 선글라스는 그럴 여지를 없애버리는 것이지. 무례하지도 않고, 쓸모도 많은데 이런 부가기능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현대인들의 필수품이라 할만하다.

나를 비롯한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과도하게 많은 사람들과 마주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살면서 이리저리 스쳐지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내 삶과는 상관이 없다는 뜻이겠지. 아마 후자가 맞을거다. 아주 일부, 그러니까 고작 열도 안 되는 사람들 빼고는 눈 막고 귀 막고 살아도 아무런 상관 없는 게 현대인의 삶이라니 좀 삭막한 느낌도 든다.

요즘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읽고 있다. 대단한 작품임에야 이론의 여지가 없지. 내가 즐겨 읽는 여타 소설과 크게 다른 점을 꼽으라면 등장 인물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거다. 그렇다고 그 인물들의 이야기가 사족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잘 쌓인 벽돌 건물처럼 맞아 들어간다. 작가가 심심해서 그리 많은 사람들을 무대로 끌어온 게 아니라 시대가 그러했던 탓이다. 그 시절 사람들은 혼자서 혹은 몇몇이서 생존할 수 없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부대끼며 살아야 했다. 그것도 아주 밀접하게 말이다.

그런 시대를 배경으로 했으니 군중극에 가까운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겠지. 반면 내가 즐겨 읽는 하루키의 소설만 해도 등장 인물의 수는 얼마 안 된다. 친한 인물들이라 해도 떨어진다고 뭐 어찌 생존에 위협을 받고 그러는 일은 없다. 내가 문학엔 젬병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게 현대 문학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현대 소설의 특징이라기보다는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그런 것이지 뭐. 보기 싫어도 계속 봐야 하는 사람 따위는 없는 시대 아닌가.

나는 도움이 필요하면, 돈을 주고 사람을 구한다. 글쎄 그 일 잘 해줄 친척이 있다면 당연히 얘기는 건내 보겠지. 그런데 친척 믿었다가 뒷통수 씨게 맞은 적도 있고, 그딴 인간을 계속 보고 살아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 옛날처럼 싸웠다가 화해하고 또 싸우고 화해하고 뭐 이런 지지고 볶고 어쩌고 미운정이 어쩌고 하는 거 이제 없다. 참 인간 관계라는 게 파편화 되고, 가벼워지고, 또 부서지기 쉬운 게 확실하다.

그럼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 관계에 조심할 일이 늘었다는 게 아닐까 싶다. 인간의 행복은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 가까운 인간 관계마저 끊어지기 쉬우면 마땅히 조심을 해야지.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부모 자식 사이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부모님과 나는 빈말이라도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미국 오기 전에도 그랬다. 그래서 내가 미련 없이 미국행을 마음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게 내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지금에야 아빠 좋다고 매일 난리를 치는데, 내가 잘 못하면 이 게 유지가 안 될 것이다. 그럼 행복할 일이 아주 심각하게 줄어들지 않겠나. 그러니 우리 애기들 안아줄 수 있을 때 많이 안아주고, 친밀할 관계가 계속 유지되도록 각별히 노력을 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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