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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 Life

저녁이 있는 미국 생활

며칠 전 한국에서 사는 죽마고우로부터 연락이 왔다. 뭐 연락이야 자주 오는데, 그날 퇴근하고 뭐 하냐고 물어보더군. 난 솔직하게 그날 계획을 말했다. 미시건호에서 서핑하고 맥주 마시러 간다고. 나도 알고는 있지만, 걔는 한국 직장인으로써는 꿈도 못꾸는 일이라며 나보고 팔자가 늘어졌댄다. 늘어졌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좀 좋아지긴 했지.

서울에 한강이 있긴 해도, 워낙 많은 사람들이 사니까 서핑이 쉽진 않겠지. 하지만 그보다 더 큰 한계는 퇴근 시간. 걔는 매일 8~9시나 되어야 퇴근을 한다는데, 이러면 뭘 할 수가 없겠지. 내가 한국 살 때를 생각해보면, 뭐 저정도 퇴근 시간도 아주 양호한 편이긴 하다.

2008년 어느날 난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회사에서의 내 평판과는 상관 없이, 이 조직에서 내가 할 일은 다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여기 머물면 무슨 일을 하게 되겠구나 하는게 뻔히 보이더란 말이지.

알음알음 회사를 옮겨보라는 제의는 많이 받아보고 있었고, 그 중에는 혹했던 것도 있었다. 고민하던 중에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왜 내게 이런 제안을 했을까?”
(1) 내가 마땅히 더 좋은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서.
(2) workhorse가 필요해서.
가끔은 둘 다였었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대부분 (2)였을게다. 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말이지. 내가 나이가 들어서, ‘젊을 때 일을 더 할 걸’하고 후회할 것 같진 않더라고. 그럼 지금 안하면 나중에 후회 할 것 같은 일을 저질러보자고 해서 유학을 선택했다.

그렇게 미국에 왔고, 운 좋게 정착을 했다. 여기서 살아보니 장점이 참 여러가지다. 보통, 숫자로 보이는 연봉을 떠올리기 쉬운데, 이건 중요하지 않다. 한국에 있었으면 근처도 가보기 힘들 연봉을 받고 있긴 하지만, 세금이 어마어마하다. 지금도 기억난다. 처음으로 페이첵을 받았을 때의 그 느낌이 아주 뭐랄까… 참신하게 줫다 뺏기는 기분. 어휴 근데 그건 뭐 시작에 불과했지. 소득세 말고도 참 뭐가 많더라고. 시작도 미약하진 않았는데, 지금은 뭐… 이미 웅장하다.

가장 좋은 점은 삶의 질이다. 5시 조금 넘어서 퇴근하고, 휴가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삶. 한국에서도 소위 ‘신이 숨겨둔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은 퇴근 일찍 하긴 하더라. 하지만, 걔네들은 그 직장을 관두면 그 생활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반면 이 동네는 거의 다 이렇게 산다. 설사 연봉을 맞춰줄테니 한국에 돌아오라고 해도 가기 싫다.

이렇게 개인 시간이 많다보니 애들이 항상 뭘 하고 있다. 더러는 진학이나 시험 준비를 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취미생활 같은거다. 누구는 마라톤을 등록해놓고 훈련을 받고 있고, 누구는 쿠킹 클래스를 다니고 있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농담하는 줄 안다. 한국과는 분위기가 참 다르다. 거기선 회사일에 몸바치는 걸 미덕으로 아는 사람들이 참 많았는데 말이다. 거기서도 난 시간을 쪼개서 악기를 배웠지만, 내가 별난 사람이었지.

모두 다른 관심사를 가지고 있고, 다른 것을 하고 배우고 있다. 그래서 파티에 가도 재밌는 얘기를 많이 듣게 되고, 내 삶도 덩달아 풍성해지는 기분이다. 한국에서는, 뭐 파티래봐야 다 술이고, 대화 소재래야 일하고 여자 빼면 몇개 남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사람 만나는 것도 더 즐겁다.

한번 사는 인생, 그 중에 길지 않은 젊은 날을 남에게 갖다 바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밥먹고 살아야 하니 하루종일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 수는 없지. 퇴근 후에라도 취미생활 하고, 휴가도 원할 때 쓸 수 있는 지금 생활은 매일 야근에 툭하면 새벽에도 불려나오던 한국에서 일하던 때에는 감히 상상도 못했다. 미국으로 온 게 내 인생에서 가장 잘 한 결정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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