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

안경과 술의 등가교환?

이쯤에서 사투리 때문에 싸운 에피소드 하나 덧붙이는게 나쁜 생각 같지는 않다. 어느 해 여름 늦은 시간, 친구와 둘이서 술과 안주거리를 잔뜩 사서 그 친구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같이 오기로 한 다른 친구들이 길을 못 찾고 헤매는 게 아닌가. 그 동네 지하철역이 워낙 복잡하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친구는 길 잃은 부산 총각들을 데리러 가고, 나는 출구 앞에서 짐을 지키고 있었다.

좀 오래 걸린다 싶었는데, 거나하게 취한 20대 후반 남자 둘이 길을 물어왔다. 이 복잡한 동네에서 술까지 취했으니 헷갈릴 만도 하지. 성의껏 설명을 해줬는데 다짜고짜 내가 사투리를 쓴다며 발길질을 하고 주먹까지 휘둘렀다. 아무리 취했어도 상대는 둘. 이만하면 줄행랑을 치는 게 정석이다. 그런데 난 지키고 있는 짐이 한가득이었다. 그래 봤자 술과 안주지만, 혼자서 들 만한 무게도 아니고, 그걸 놔두고 도망가기에는 너무 소심했다.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조나라의 군대 앞에 선 한신의 심정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이 둘을 어찌 상대해야 하나 하는 절박함과, 빨리 나타나지 않는 친구들에 대한 원망 중에 어느 것이 컸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타이밍 좋게 친구들이 등판해서 날 구해주는 일은… 아쉽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취객을 날렵하게 때려눕혔더라면 평생 떠들 무용담이 생기는 거지만, 난 ‘이단 헌트’ 같은 특수요원은커녕 신검을 막 통과한 징집 대상자일 뿐이었다. 근데 뭐 어찌 어찌하여 물리치긴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니 알 리가 없는, 친구들은 한참이 더 지나서야 나타났다.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한마디 툭 던지더군.

“야 니 안경 어쨌노?”

이미 깊은 밤중이었고, 헤매느라 힘도 들었겠지. 그 밤중에, 하필이면 어두운 색이었던, 내 안경을 찾는 게 쉽지도 않을 것 아닌가. 깔끔하게 포기하고 술이나 먹으러 가기로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더라. 이 무심한 친구는 바로 지금 이 책을 같이 쓴 ‘잔마왕’이다.

 

————————————————————-
본문은 ‘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에 실린 글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