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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

불가침의 영역

“그들은 내 가족이야. 함께 있어야 해.”

토이 스토리 3에 나오는 대사이다. 악당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설득을 포기하고 곧장 물리력을 행사한다. 난 이 장면을 보면서 각본이 뭐 이렇게 허술하냐고 불평했다. 가족 한마디에 포기를 하다니 메인 빌런이면 마땅히 더 집요해야 하지 않은가? 헐리웃 영화들을 보면 비슷하게 가족의 사랑이 강조된 장면이 많다. 솔직히 난 좀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이곳 사람들과 부대껴보니, 정말 그렇게 산다. 미국에서 가족은 불가침의 영역이다. 여기에 관련된 일화를 몇 가지 소개해보고 싶다.

먼저 뉴욕에서 일하던 친구에게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아이가 좀 아팠는데 동시에 중요한 일이 생겨서 야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집에 애 엄마가 있으니까 그 친구는, 한국에서 하던 대로, 자연스럽게 야근을 했다. 저녁밥은 먹어야 하니까 동료들과 샌드위치를 집어먹었고, 그 자리에서 아이가 아프다는 얘길 꺼냈다.

그 말을 들은 동료들이 모두 깜짝 놀라더란다. 아이가 아픈데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냐고 되물으며 빨리 집에 가라고 난리였단다. 아픈 아이 곁에 있어주는 게, 비록 아빠가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도, 이 동네 기준으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인 거다.

한국에서라면,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그 상황에 일을 선택하는 게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아니라면 자기 일에 무책임하다는 평판이 따라붙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렇게 하면 무책임한 아빠가 된다. 남의 일에 왈가왈부하지 않는 게 이 동네 사람들이래지만, 아픈 아이를 두고 일을 하는 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거지. 미국인들과 일을 하게 된다면 유념해야 할 상황이다. 아픈 아이를 두고 일을 하라는 요구를 하게 되면… 뭐 행운을 빈다.

두 번째 일화는 내 친구와 수학했던 어느 한국인 교수 이야기이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미국 남부의 대표적인 명문대에 교수로 임용되었다. 기쁨도 잠시, 사정이 생겨서 한국으로 돌아가 가족을 가까이서 돌봐야만 했다. 마침 한국의 모교에 자리가 나서 그리로 가기로 했고 자신의 박사학위 지도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이 결정을 조심스럽게 털어놨다.

교수들에게는 자신에게서 박사학위를 받은 학생들은 자식이나 다름없다. 그들이 어떻게 성장하느냐가 본인의 평판에도 크게 영향을 준다. 예상대로 지도교수는 격렬히 반대했다. 물론 한국의 모교도 좋은 대학이지만, 세계적인 탑스쿨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니까. 그런 곳에 임용된 제자가 자랑스러웠을 테니 지도교수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이다.

그런데 그 한국인 교수가 ‘가족 일’이라고 털어놓는 순간, 지도교수의 태도가 바뀌었단다. 그래 가족이 중요하지. 한국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연구도 열심히 하려무나. 이러면서 화기애애하게 헤어졌다고 한다.

내세울 만한 일화가 아니더라도, 미국 사람들이 가족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휴일이나 오후 늦은 시간 동네 놀이터에 가보면, 가족들로 득실득실하다. 퇴근을 일찍 하니 가능한 일이겠지만, 주로 아빠들이 정말 열심히 놀아준다. 형제나 조카들 생일은 또 얼마나 칼같이 챙기는지. 미국에서 절대 외식을 하면 안되는 날이 바로 ‘어머니의 날’이다. 줄 오지게 선다. 또 하나 가족과 보내는 날이 크리스마스인데, 캐나다 밴쿠버 출신인 친구는 이날만은 꼭 시카고에서 거기까지 날아간다. 직장 동료들도 다 부모님 댁으로 가기 때문에, 그 근처에 회사에 나와보면 나처럼 외국인이거나 이민 1세대 밖에 없다.

어릴 때부터 이러고 사니 가족들과 끈끈할 수밖에 없지. 헐리웃 영화의 장면들은 과장된 것도 아니고, 영화 제작자들이 주입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도 아니며, 그냥 그들이 사는 바로 그 모습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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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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