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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 Life

치질 수술비로 본 미국 의료

먼저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게 있다. 미국에는 다양한 의료보험이 있고, 거기에 따라서 의료비는 천차만별이다. 그냥 이런 사람이 있구나 하는 정도로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한국에도 미국 의료비에 대한 호러스토리 들어본 사람이 많더라. 미국에서는 맹장수술 하나에 천만원씩 든다는 얘기 같은거 말이다. 뭐 맞는 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일단 내가 받은 치질수술, 한국에서 하면 30~40만원 정도란다. 물론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니까 병원에 지불된 총 비용은 더 비싸긴 하겠지.


전체 청구된 비용은 $22,481.18인데 내가 쓴 돈은 $61.61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치질 수술하는데는 $61 밖에 안드는구나라고 오해하면 안된다. 이게 무슨 소린지 이제부터 자세히 따져보겠다.


미국 의료보험에는 Deductible과 Maximum Out Of Pocket이라는 개념이 있다. 둘 다 연간 누적 금액이고 Deductible은 보험이 적용되는 최소의 의료비, Maximum Out Of Pocket는 Deductible 외에 내가 최대로 부담해야 하는 금액이다.


예를 들어 $1,000 Deductible에 $2,000 Maximum Out Of Pocket인 의료보험을 내가 갖고 있다고 가정하자. 연간 의료비가 $1,000이 되기 전까지는 그냥 내가 다 낸다. 감기 걸려서 병원비 $300 나오면 내 주머니에서 다 나간다. 그런데 치료비가 Deductible에 미치는 순간부터 보험사가 돈을 내준다. 연간 의료비가 $1,500이라면 처음 $1,000은 내가 내지만 나중 $500에 대해서는 보험사가 90%를 내준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러면 실제로 내가 쓰는 돈은 $1,050이 되는거지. 그러다가 내가 쓰는 돈이 $3,000(1,000 + 2,000)이 되면, 그 뒤로는 보험사가 100% 부담한다. 적고보니 이 가상의 보험은 내가 실제 갖고 있는 것보다 훨씬 좋네.


또 한가지 알아둘 것은, 병원에서 청구하는 금액이 내가 내는 금액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의료보험공단이 의료행위마다 “수가”라는 것을 정해놨다. 병원과 보험사 사이에서 정해진 “수가”가 여기 미국에도 있다. 이 수가는 병원에서 청구하는 금액보다 낮다. 대략 1/2에서 1/3 수준이다. 그래서 Billed Amount에 으례 Discount가 따라붙는다.


만약 의료보험이 없다면, 병원에서 청구하는 금액을 거의 다 뒤집어쓸 위험이 있다. 어느 누군 의료보험 없다고 했더니 40% 깎아줬다는데 난 10% 밖에 안깎아줬다는 사람도 봤다. 그러니 의료비가 Deductible 안쪽으로 나왔다고 해도 보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보험이 없다면 진료비 자체가 훨씬 비쌀테니.


난 이미 Deductible을 채운 상태여서 치료비의 아주 일부만 부담했다. 이건 내가 다른 병원에서 몇천불을 이미 썼다는 뜻이다. 만약 Deductible이 비어 있었다면, 저기서 몇천불 더 냈을 것이다. 보험이 없었다면, $22,481.1에 가까운 돈을 낼 뻔 했다. 10% 깎아줘도 $20,000인데, 저정도 되는 현금을 당장 마련할 수 있는 사람 흔치 않을거다.


멀쩡한 직장 갖고 있고 돈 잘 버는 사람들은 보험도 보통 빵빵한 걸 갖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야 갑자기 치질수술이라는 재난이 닥쳐도 부담없이 파고를 넘을 수 있다. 외노자인 나조차도 $61로 이 난국을 헤쳐나갔으니. 그런데 갖고 있는 보험이 후지거나 아예 없다면 얘기가 다르다. 그런 사람들은 보통 직장이 안좋거나 가난한 사람들일텐데, 그들에게는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보험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미국 의료비가 너무나 비싸다. 수술 날짜를 잡기 위해서 전문의를 만난 날 청구된 금액이 $2,000이 넘는다. 난 의사와 있었던 시간이 20분도 안된다. 그냥 의사가 똥꼬를 만져보고 상담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왜 $2,000씩이나 되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그리고 수술날에는 의료비 전담 변호사가 있는지 물어보더라. 나야 보험사가 거의 다 내주니 의료비는 신경도 안썼는데, 미국에는 의료비 깎아주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가 많단다. 실제 내 주위에도 의료비로 소송중인 사람이 있다. 그런 걸 고려해서 비싸게 청구를 하는 걸까?


미국의 의료시스템은 절대 따라할만한 것이 아니다. 의료, 보험 산업이나 변호사들에게 시장이 열리긴 하겠지. 그러나 한줌도 안되는 그 사람들 돈 더 벌어주고자 절대 다수의 사람들을 괴롭힐 수는 없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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