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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 Life

망나니 학생 과외하기

과외는 대학시절 내 생계수단이나 다름 없었다. 모범생부터 문제아까지 다양한 애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돌아보면 좋은 경험이었다. 조용한 성격 탓에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는 걸 즐겨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라도 나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겪어볼 수 있었으니까.

 

친구들과 ‘누가 더 골때리는 학생을 맡았나’를 주제로 배틀을 떴을 때 나를 무적으로 만들어줬던 학생이 하나 있다. 겨우 몇달만 했을 뿐인데, 과외 생각하면 걔 생각이 난다. 아니 덕분에 겪어야만 했던 우여곡절이 떠오른다. 그 학생의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걔가 보여준 퍼포먼스(?)만은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난 성적이 낮은 학생이 더 성적을 올리기 쉬울줄 알았다. 그러던 내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나타났다. 걔의 성적은 이항분포의 완벽한 예였다. 그냥 찍었을 때의 확률 그대로 나온다는 뜻이다. 게다가 행실도 썩 모범적이지는 못했다. 주변에도 본인과 비슷한 친구들 밖에 없는 듯 했다.

 

그 학생과 보냈던 하루 하루가 충격과 공포의 연속이었지만,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고3이 되도록 X, Y 좌표에 점을 찍을 줄 몰랐다는 것이다. (2, 1)이 어딘지 모르더라! 모르면 진작 말을 하지. 아는 척 하면서 엉뚱한 짓을 하길래 장난을 치나 했다. 나도 설마설마 했던게지. 그런데 진짜 설마가 사람 잡더라고! 이 에피소드를 패로 쥐고 있으니 앞서 말한 배틀에서 질 수가 없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속을 썩였지만, 나도 참 대단한게, 걔의 완강한 거부를 뚫고 머리 속에 공식 몇개는 집어넣어줬다. 시험에 안나올 수가 없는 공식들이었다. 말이야 간단한데,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을 내가 이룬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데 재능이 있는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평소에도 온갖 핑계로 과외를 째거나, 문을 안열어주는 일이 있었지만 이 때는 좀 심해서 거의 한달동안 과외를 못했었다. 오랜만에 갔더니 수능 모의고사를 봤었더라고. 시험지를 펴보니 딱 확률대로 점수를 받아왔더라. 100점 만점에 21점 이런 식으로. 난 이상하게 생각했다. 비록 몇개 안되지만 확실히 익힌 공식들이 있는데. 그게 시험에 안나왔을 리는 없고. 그래서 찬찬히 시험지를 살펴봤다.

 

내가 가르쳐준 게 시험에 나왔더라. 그런데 말이야. 시험지 전체에 연필 자국이 몇개 없었다. 정말이다. 뭘 해본 흔적 자체가 없었다. 도대체 그 시간에 뭐했을까? 심심하지도 않았나? 분명히 몇 문제는 풀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문제를 읽어볼 끈기도 없었던게다. 덤으로 점수 계산도 잘못해서 실제로 받은 점수는 더 낮았다.

 

그 학생에게 틀린 문제 몇개를 풀어보게 시켰다. 중간에 계산을 성의없게 해서 틀린 것도 있지만 맞은 것도 있었다. 왜 안했는지 물어봤다. 공부를 안하던 머리라서 골치 아파서 못했단다. 그러면서 자기도 할만큼 했단다. 나는 그제서야 얘 성적이 왜 이런지 완전하게 이해했다.

 

나도 어느 정도는 마음을 먹고 갔던 것 같다. 과외를 자꾸 빼먹으니 돈을 제 때 받을 수가 없어서 전공서적 사기도 어려웠다. 과외야 또 구하면 되는데 이상한 애 때문에 이 골치를 썩힐 이유가 전혀 없었다. 주변 사람들도 내 고충을 알고 새 자리를 알아봐준다고 그러던 참이였다.

 

눈을 지긋이 감고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지 정리해봤다. 대충 이렇게 말해줬던 것 같다.

 

“팔자에 없는 고생 시켜서 미안하다. 오늘로 과외는 그만 하자.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나한테서 과외를 받아봐야 넌 대학에 갈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받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모님께도 그렇게 말씀드려라. 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든 어떻게든 공부하고 상관없는 길을 가라.”

 

그 학생은 뛸듯이 기뻐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공부 시킬 땐 똥씹은 얼굴을 하고 앉아있더니. 그렇게 생기 있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내가 그동안 얘를 데리고 무슨 짓을 한건가 싶었다. 그리고 그 집을 떠났다. 속이 다 후련했다. 결국 마지막 달 과외비를 떼인 건 뼈아팠지만 잘 한 결정이었다.

 

그 뒤로 소식을 들은 적은 없지만 왠지 나름대로 잘 살고 있을 것 같다. 하기사, 원의 표준형 공식 따위, 사는데 무슨 상관이라고. 공부만 안시키면 행복할 앤데, 사람 사는 방법이 한가지가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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