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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 Life

내 머릿 속의 한국

한국에서 살다가 이민 나간 사람들은 아직도 한국이 자기가 살던 시절에 머물러 있는 줄 안다지. 뭐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처음으로 코리안 타운에 갔을 때 나도 그렇게 느꼈다. 어느 맥주집에 갔는데 딱 1990년대 서울 대학가에 있던 술집을 빼다박았더라.

미국 온지 10년 다 되어가니까 이게 이해가 된다. 점점 한국에 관심이 없어진다. 내가 보는 한국 뉴스래야 경제 쪽이 다다. 심지어 롯데 자이언츠 선발진이 누군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롯데 자이언츠는 로감독 아래서 공격적으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타자들이 있던 팀이다. 마누라와 손민한, 이대호 져지를 나눠입고 잠실에 가서, 잘 던지다 무너지는 조정훈을 보고 망연자실하던 바로 그때 그 기억 속의 롯데 자이언츠다.

마누라는 한국 드라마를 열심히 봐서 아직도 한국 연예인이 어쩌고 하는 소리를 하는데 난 도통 관심 없다. 나하고 별로 상관 있다는 생각이 안드니까. 그런데 이게 또 사실이다. 나한테 관련이 있는 뉴스는 한국의 포털에 떠 있는게 아니라 아이폰의 뉴스앱에서 나온다.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주제도 NPR의 아침뉴스에 있다. 거기서 한국이 다뤄지는 경우는 얼마나 드무냐.

예를 하나 든다면,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의 NPR 뉴스다. 한국에서 선거가 있었던 다음날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도 당선이 됐다. 둘 다 흔하지 않은 과정으로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뉴스에서 예외적으로 크게 다뤄졌다. 난 이 토픽이 며칠은 더 갈 줄 알았다. 그런데 하루만에 이게 다 쓸려나가더라. 왜냐하면 바로 그 다음날 FBI의 전 수장인 제임스 코미가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압력을 받았다는 사실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며칠 후, 나도 제임스 코미의 청문회를 라디오로 듣고 있었다. 사람들도 만나기만 하면 이 이야기였고, 한국과 프랑스의 새 대통령은 관심도 없더라.

빠르게 변하는 한국을 꾸준히 따라잡아야 할 실용적인 이유도 없다. 한국에 돌아갈 계획도 없고, 자주 방문하지도 못한다. 한국에 가도 오랜만에 추천서 받으러 모교에 갔을 때와 느낌이 비슷했다. 내가 모교에서 어느 교수가 퇴임하고 부임했는지 알 필요가 없는 것처럼, 한국에 무슨 변화가 있는지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냥 바뀐 자판기 위치나 알면 그걸로 충분하다.

한국에 대해서 옛날 인상을 그대로 갖고 있다는게 어떻게 비웃음거리가 되나. 오히려 미국 생활 오래 해도 한국을 못잊고 한국 유행을 따라가려는게 이상하지. 대학교 졸업하고 회사 다니면서, 학교 앞 만화방에 베르세르크가 몇편까지 들어왔는지 관심 가질 필요가 있을까. 새로운 동네에 와서 거기 잘 적응하고 사는건 칭찬해줄 일이다.

약간 아쉽기도 하다. 한 때는 나의 정체성의 큰 부분을 이루고 있었던게 이렇게 잊혀지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나라에 와서 가족까지 이루고 살고 있는데. 내가 마주해야 할, 혹은 감당해야 할 현실은 한국이 아니라 바로 여기 있으니.

살아가는 과정이란 게 그런거지 싶다. 새로운 것에 익숙해지고, 옛 것은 잊혀지는게지. 이게 비단 옛날에 살았던 동네 뿐이겠나. 사람도 유행도 다 그런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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