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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 Life

정규 정보원이 생겼다

우리 첫째는 아직 생각하는 거나 행동하는 게 애기 같다. 질문을 하면, 제대로 된 대답이 잘 안 나온다. 아주 범위가 작은 질문, 그러니까 “이 감자튀김 짜?” 이런 질문에는 제대로 된 답을 주는데, 종합적인 사고를 요하는 질문, 그러니까 “오늘 학교 어땠어?” 이런 건 제대로 답을 못 한다. 잘 해봐야 그냥 단편적인 조각들만 들려줄 뿐이다. 순서도 뒤바뀐 게 많고, 몇 주 전에 있었던 일을 방금 전에 있었던 것처럼 얘기해주는가 하면, 진위도 의심스러운 게 많다.

얘가 어디 특별히 모자라서 그런 건 아니다. 애들이 원래 이렇다. 저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려면 일단 그날 학교에 있었던 일을 머릿 속에 나열해야 하고, 그 중에 중요한 것들을 판별해내서 다시 언어로 구성을 해야한다. 이게 아직 안 되는 거지. 그렇다고 선생님에게 매일 물어볼 수도 없고, 선생님에게 듣는다 해도 부족한 게 많다. 그럼 이 갈증을 어떻게 풀어야 하느냐? 예상치 못한 데서 아주 깔끔하게 해결됐다.

우리 애가 1 학년이 되면서 어느 아이와 친해졌다. 킨더 때부터 알긴 했는데, 같은 반이 되더니 엄청 친해지더라고. 어느 정도냐 하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집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와서 놀더라. 전부터 그 나이치고는 몸도 잘 움직이고 똘망똘망해 보였다. 근데 자주 보면서 얘기도 해보니까 예사롭지 않게 똑똑한 아이더라. 얘를 통해서 통해서 학교에 대해서 궁금한 거의 모든 것의 답을 알아낼 수 있었다. 교실 운영 방법과 수업 방식 등등 학교에서 어떤 걸 한다 뿐만 아니라 차마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까지 다 까발려주고 갔다. 덕분에 우리 마누라는 속이 다 시원하단다. 나도 똑똑하지 않은 아이들 이름이 나올 때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마음대로 우리집에 놀러온 일로 꾸중을 들은 모양이더라. 뭐든 사전에 부모끼리 약속을 하고 노는 게 그 집의 룰인 것 같더라. 3학년짜리 형제가 있는데 아직 걔도 마음대로 친구 집에 놀러가는 걸 허락하지 않는단다. 근데 이 1학년 애가 family rule을 자꾸 깨고 있었던 것이지. 혼이 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긴 하다. 허나 우리 첫째가 이상한 애도 아니고 우리집에서 노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냥 매주 목요일마다 학교 끝나고 우리집에서 놀기로 약속을 했다.

우리야 좋다. 우리 애가 학교에서 잘 했는지 잘 못했는지도 알려주는 훌륭한 정보원이 정규 정보원으로 승격이 된 것이랄까. 우리 애에 비하면 얘는 충격적으로 말을 잘 하는데, 자주 보면서 좀 배웠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참 뭐랄까. 우리 애가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친구 저런 친구 사귀고 각자의 성격도 만들어져가고 말이지. 여기에 내 역할이 있냐면 뭐 크진 않지만 잘 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베프라는 녀석이 하나 있다. 여러 모로 튀는 구석이 많은 친구인데, 그 무렵 가장 내게 큰 인상을 남긴 것은 가족이 너무나 화목하더라는 것이다. 걔의 집에 처음으로 간 날이었다. 걔 아버지께서 친구 아들이라며 너무 따뜻하게 맞아주시더라. 그리고 뭐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가깝다는 것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아버지께서 퇴근도 하셨겠다 우리를 데리고 근처 식당에서 소주 한 잔 하러 가셨고 우린 좀 있다가 학원에 갔다. 우리집하고는 그냥 공기가 달랐다. 그래서 걔 집에 그렇게 자주 갔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친구가 워낙 공부를 잘 하기 때문에 그렇게 집안 분위기가 좋은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한참 못 미치니까 우리집이 그 모양인 줄 알았지. 뭐 내가 집에서 맨날 듣는 소리가 그런 거였기 때문에 난 실제로 그리 믿었던 것이고… 나중에 뭐 좀 더 커보니 이건 뭐… 집안 꼴이 그런 걸 애 핑계를 대면서 화풀이를 하는 부모가 있는 가정이 어찌 화목할 수 있겠나. 아무튼 그 날 그 친구의 집에 간 기억은 지금도 내게 너무나 좋게 남아 있다. 그러니 내 역할이라는 것이 딱 나와 있다. 내 아이를 사랑해야 하고, 그런 모습을 그 친구들에게도 보여주며, 놀러 온 아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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