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imple Life

챠콜 그릴의 세계로 입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이고 그의 책 중에 가장 좋아하는 건 ‘먼 북소리’이다. 한국에 있을 때도 좋아했고, 지금은 오히려 뭐 태어난 곳과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는 점 때문인지 더 좋다. 이 책에서 한국에서 살 때는 별 느낌이 없었지만 이 동네 살다보니 머리에서 떠나가지 않는 에피소드가 있다. 화로에 전갱이를 구워 먹는 것이다.

흔한 생선을 구워먹은 게 무슨 대수냐 싶지만, 그리 간단하지 않다. 장소가 그리스의 어느 섬이고 화로가 없었기 때문이다. 뭐 책에서는 풍로로 번역했는데 화로가 맞지. 제대로 된 생선구이 자체를 못 먹다가 동네 어느 주민이 저걸로 생선을 구워먹는 걸 보고는 빌린 게지. 비롯 숯이 없어서 나뭇가지를 화로에다 태우고 석쇠에 생선을 얹어서 구워먹었는데, 생선 살에서 나무의 향이 느껴지는 순간 너무나 감동했다며 구구절절히 써놨다. 진짜 감동이 컸는지 무려 사진으로까지 남겨놨다. 근데 그 책에 사진이 몇 장 없는데 그 중에 하나가 생선을 굽는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그 화로를 빌려준 사람이니 말 다했지 뭐.

읽을 때야 그러려니 했는데, 화로에서 구워지는 생선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나도 저렇게 생선이든 삼겹살이든 구워먹어야겠는데 하면서 비슷하게 생긴 화로를 아마존에서 검색해서 보고, 한국 네이버에서 어떻게 공수해올 수 없을까 궁리해본 적도 있다. 결국 내가 산 것은 Weber Go Anywhere 되시겠다. 무엇보다 가격이 싸고 크기가 적당하다. 하루키도 나와 같은 처지였다면 이걸 샀을 거다.

사실 편의성이라면 지금 사용하는 생선구이기만 할 수가 없다. 숯의 향이라는 게 그리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고, 조작도 간단치 않기 때문에 원하는 정도로 굽기가 잘 안 될 수도 있다. 벌써 생선구이 망하고 마누라의 한심한 듯이 바라보는 눈빛이 상상이 된다. 뭐 어쩌라고. 뒷산 원숭이라고 생각하십시오. (하루키 형님의 표현을 빌렸다.) 그래도 인생이란 게 뭔가? 인생은 뭔가 하는 거다. 머릿 속으로 백번 생선 숯불구이 시뮬레이션을 돌려봐야 뭐 하냐. 그냥 내가 직접 해보는 게 훨씬 많은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데. 즐거움도 얻을 수 있고. 잘못되어봐야 기껏 뒷뜰 나무를 태워먹는 것 정도 아니겠는가? 뭐 이건 좀 큰 일이겠다.

아무튼 그릴도 왔고, 불 피우는 도구도 샀고, fire starter는 집에 있던 거 쓰면 되고 만반의 준비를 거쳐서 시운전을 해봤다. 생선은 아직 겁나서 못 해봤고 삼겹살로. 차콜에 불이 붙고 연기가 올라올 땐 어찌나 흥분되던지. 시간이 꽤 걸리긴 했는데 어째 뭐 되긴 했다. 내가 차콜이라는 걸 써보니까 이건 직화로 쓰는 게 아니라 훈연에 쓰라고 만든 것 같다. 그렇게 훈연을 하려면 저렇게 작은 휴대용으로는 안 되고 좀 큰 걸 사야 하는데 잘 못 산 것인가 이런 생각도 드네. 뭐 하여간 그래도 훈연과 직화를 섞어서 장장 2시간이 넘게 걸려서 제법 그럴싸한 통삼겹살을 구워냈다. 맛도 꽤 괜찮았다.

아이들은 또 만들어 달라고 하지만, 마누라의 눈치는 별로 신통찮다. 그래도 난 이걸로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고 나쁘지 않은 결과도 만들어 냈고. 이러다가 재미 붙이면 스모커를 들여놓을지도 모르겠다. 마누라는 그 때도 마뜩찮은 눈빛으로 보겠지. 하지만 내가 뭐 이런 거 하나 못 하는 팔짠가.

반응형

'Simple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경리의 토지 감상평  (2) 2023.12.13
블랙 프라이데이 쇼핑  (1) 2023.12.02
시카고에서 한국 책 읽기  (2) 2023.11.04
정규 정보원이 생겼다  (0) 2023.11.02
남자는 여자와 다르다  (0) 2023.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