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imple Life

옛 친구 같은 밴드

중학교 3학년 땐지 고등학교 1학년 땐지 모르겠는데, 시카고라는 밴드의 21집을 구해서 들어보았다. 뭐 우리집이 음악 같은거 듣는 분위기는 아니어서 이런 거 잘 모를 때긴 했는데, 정말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어떻게 사운드가 이렇게 박력 있으면서도 섬세한지. 또 앨범의 모든 곡이 다 일정 수준 이상이었다. 게다가 한 그룹에 보컬도 여러명이고 말이지. 내가 앨범을 통째로 들어본 일이 별로 없긴 했는데 어지간한 한국 가수는 상대도 안되게 느껴졌다. 아니 사실 상대도 안되었던 게 사실인 것 같다. 한 두곡, 혹은 두 세곡 정도 공 들이고 나머지는 시시한 곡들로 채워서 앨범이라고 내는 게 대부분의 가수들이었으니까. 뭐 외국 가수들도 대부분 그러긴 했지.

그렇게 시카고라는 밴드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옛날 음악들도 찾아서 들었다. 내가 락 음악을 엄청 좋아한다고는 할 수 없어서 대단한 팬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들의 음악을 즐겨 듣게 되긴 했다. 시카고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락이긴 하지만 흡사 빅밴드 같은 악기 구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 독창적이다. 덕분에 전형적인 락과는 조금 분위기가 다른 곡들이 많았다. 그런 점이 크게 와 닿았던 것 같다. 물론, 어차피 락 그룹이니까, 보통의 락 발라드나 뭐 그런 곡들도 많고, 나도 그들의 그런 노래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뭐… 소녀시대가 아이유 노래를 부르면 그런 기분일까. 잘 하긴 하지만 너희 특장점은 따로 있잖아. 이런 느낌. 뭘 하건 간에 본인 자유이니 내가 할 말은 없지만.

며칠 전에 문득 옛날에 들었던 시카고 21집이 생각나더라고. Amazon Music 덕분에 다시 이 앨범을 들었고 이들의 근황도 확인했다. 놀랍게도 말이다 지금까지도 앨범을 내고 있더라. 60년대에 결성된 밴드가 2022년에 스튜디오 앨범을 내다니. 내친 김에 이것까지 찾아서 들어봤다. 뭐랄까. 이들의 정체성이 물씬 묻어나는 사운드를 들으니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물론 그들의 전성기는 지나갔다. 주류 시장에서의 스포트라이트는 더 이상 이들을 주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들은 그 자리에 계속 있었던 게다. 아직 고향을 지키고 있는 옛 친구를 다시 만난다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이렇게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다면 그만둘 이유가 없겠다 싶기도 하고. 덕분에 40분이나 연착된 기차를 타고 출근하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정말 고맙다.

여담으로 시카고 21집은 이 밴드의 역작 같은 게 전혀 아니다. 그냥 망한 앨범이다. 음악은 원없이 만들었으나 좀 덜 팔렸다 이런 게 아니라 만드는 과정에서도 혼란을 겪다가 망할 운명을 갖고 태어났고 그대로 된 거다. 그런데 이것도 그들 기준이지 당시 한국 대중가요에 비하면 월등한 구석이 많았던 것이지. 그랬던 시절도 옛날이고 이젠 한국 가요가 미국에 수출되는 걸 보니 진짜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반응형

'Simple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번 할로윈에 배운 것  (0) 2022.11.09
1917 참 훌륭한 영화다  (2) 2022.10.31
백인 동네에서 살 때 느끼는 첼린지  (2) 2022.10.15
첫 10K 레이스  (2) 2022.10.12
오피스 복귀 2주 경과 보고  (0) 2022.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