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imple Life

어린 시절의 억울한 기억 하나

친구들 얘길 들어보면 먹지도 않은 빵을 먹었다고 형에게 맞았다는 둥, 나름 당시에는 심각했지만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하는 추억들이 많더라. 난 딱히 그런 기억은 없다. 우리 가족에는 별난 사람이 없어서일까. 그래서 친구들이 모여서 어린 시절 지지고 볶은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난 별로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일은 하나 있다. 분위기를 돋우거나 시선을 끌어모을만큼 대단한 일도, 웃긴 반전도 없어서 친구들 앞에서 풀어놓을만한 소재는 되지 못했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에 친척들과 스키 리조트에 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처음으로 가본 스키장이었다. 어떻게 놀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초보자 슬로프에서 이러저리 구르다 하루가 다 갔겠지. 빌린 장비 반납하고 숙소에 돌아왔는데, 어머니께서 동생 장비가 없다고 하시더라고.

 

난 이게 무슨 소린가 했다. 렌탈한 스키는 반납을 해야하니 당연히 숙소에는 없지. 그제서야 내가 알게 된 것은, 거기 오기 전에 어머니는 동생의 장비를 샀단다. 우리집이 수십만원짜리를 덜컥 사줄만큼 여유로운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난 살짝 놀랐다. 어쩐지 초보자인 내 눈에도 동생의 스키는 칙칙한 내 렌탈 장비보다 때깔이 고왔다. 이런 젠장, 어머니 나름 큰맘 먹고 산 건데 그게 없어진거로군. 큰일일세. 그런데 어머니는 갑자기 나에게 왜 챙기지 않았냐고 타박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동생이 동생 물건 잃어버렸으면 동생 잘못이지 왜 내 잘못인지. 또 어떻게 생긴 지도 모르고, 우리 가족 소유물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것을 내가 어떻게 챙겨. 상식 밖의 전개에 대략 정신이 멍한데다 소심했던 나는 제대로 내 입장을 설명할 수 없었다. 내가 수세적인 모습을 보이자 상처입은 물소를 물어뜯는 하이에나 마냥 어머니는 나를 더 밀어부쳤고, 구석에서 눈치를 살피던 동생도 합세했다. 그렇게 나는 죽어 마땅한 놈이 됐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던가. 마침내 나도 머리속을 정리하고 이게 내 잘못이 아님을 설명했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넘어갔고, 어머니와 동생도 이성을 잃었다. 아니 이성이 남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본인들이 엉뚱한데 화풀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는 너무 심하게 지랄발광을 했다. 상황을 바로잡으려는 나의 어떠한 시도도 본인들에게는 존재를 부정당하는 위협으로 느껴졌을 터. 수십만원이 아니라 자아 실존의 영역에까지 사태가 도달했음을 이해한 나는 얻어맞기만 했다. 나 하나 병신되고 이 난장판을 수습할 수 있다면 기꺼이 이 굿판의 제물이 되리라. 덤으로 옛말이라고 아무 때나 다 맞는게 아님을 배웠다.

 

친척들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냥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는 눈치였다. 이해한다. 누구 하나 바보 되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건 분명했고 어머니는 나보다 잃을 게 많은 사람 아닌가.

 

그날 난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는 이해했지만, 어머니가 왜 그러시는지는 몰랐다. 3학점짜리 심리학 교양수업은 인간의 오묘한 정신세계를 이해하기에는 충분치 않더라. 이제 조금 짐작은 한다.

 

앞서 말한대로 우리집은 넉넉하지 못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인지, 부유한 친척에 대한 자격지심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수십만원짜리 별 필요도 하지 않은 물건을 산 건 크게 무리한거였다. 그런데 그걸 몇시간 쓰고는 잃어버린게다. 난 아내가 2년 묵은 아이폰을 깨먹었을 때도 속이 쓰려서 죽을뻔 했는데 어찌 거기 비할 수 있을까. 이 좌절감을 남 탓으로 돌려서 붕괴되는 자아를 일으켜 세우고 싶었겠지. 그리고 재수 없게 내가 걸린거다. 핑계야 만들어내면 되고, 내가 크게 반항을 하지도 않을테고 또 때마침 눈에 띄기도 했으니. 동생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아니 더 절박했겠지. 물론 내게 뒤집어씌운게 귀감이 될만한 행동은 아니다. 허나 정당성을 따지기에 앞서서 이건 자아 실존의 문제였던게지.

 

사람이 살다보면 이정도 실수는 할 수 있다. 우리 가족에게도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니었을거다. 짐작컨데 어머니는 기억도 못하실거다. 그런데 유독 이 일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무슨 이유에설까? 아마 지금도 즐기는 취미를 처음으로 시작한 날이어서 거런 걸까? 참 모를 일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