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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 Life

Shaun White에 대한 기억 세조각

그해 겨울
미국에서의 첫번째 겨울이었다. 영어도 잘 못하고 친구도 없고 하던 중에 친해진 형을 따라 스노우보드에 입문하게 됐다. 난 원래 스키어지만 장비와 옷은 한국에 두고 왔기 때문에 새로 장만해야 할 처지였다. 이왕 새로 갖춰야 하는데 새로운 종목에 도전해보는게 좋은 생각이기도 했다. 게다가 형님께서 가르쳐주신다고도 하니까 이 기회를 놓치기도 어려웠다.

내가 스키를 배울 때 헤르만 마이어가 이상적인 모델이었듯이, 스노우보드를 배우는데 최고의 선수를 따라해봐야 하지 않겠나. 바로 그 선수는 숀 화이트. 난 오클리에서 숀 화이트 시그너처 고글을 봤고, 두번 생각하지 않고 샀다.

다음 겨울, 밴쿠버 동계올림픽이 있었다. 카메라는 겨울 최고 스타를 비추고, 난 몸푸는 그를 보고는 얼어붙었다. 숀 화이트가 쓴 것은 숀 화이트 시그너처 고글이 아니었다. 오클리는 오클리였는데, 색깔이랑 렌즈가 달랐다. 굳이 가격으로 말할 것 같으면, 훨씬 싼 기본적인 렌즈였고, 단일 색상 프레임이었다.

뭐랄까 참… 산뜻하게 엿먹은 기분이라면 설명이 될까. 숀 화이트는 고글이 어쨌거나 말거나, 간지 철철 넘치는 모습으로 하이프이프를 내려갔다. 난 그 모습을 넋놓고 바라볼 수 밖에. 하기사, 무슨 최첨단 기능 따위 고글에 무슨 상관이람. 그런것 사용한다고 기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닌데, 이 당연한 걸 지금도 가끔 헷갈린다.

미국인들이 올림픽을 즐기는 방법
2004년 동계 올림픽에서 숀 화이트는 여전히 압도적인 기량을 뽐냈다. 근데 웬걸, final round에서는 평소보다 영 못했고, 메달도 못땄다. 그 올림픽 최고의 퍼포먼스는 예선에서의 숀 화이트였다. 그정도만 했어도 우승을 했을텐데 본인으로써도 퍽이나 아쉬웠겠지.

경기가 끝난 후에 인터뷰 하는 모습을 봤다.
“3연패를 노리고 있었을텐데 아쉽지 않나요?”
“저는 4연패를 노리고 있었어요. … 오늘은 날이 아니었나보죠 (It wasn’t my day).”
상대를 의연하게 인정하고, 본인의 불운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거나 격한 감정을 쏟아내지 않았다. 쿨했다. 너무나 쿨했다.

또하나 내가 인상적으로 느낀 것이 미국인들이 올림픽을 즐기는 방식이었다. 정상급 선수들이 총출동해서 펼치는 최고의 퍼포먼스를 볼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물론 nationality가 약간은 개입해 있긴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본인의 관심이다. 관심도 없는 종목에 단지 본인 국적의 선수가 출전한다는 사실만으로 갑자기 흥분하는 사람은 못봤다. 본인 국적의 선수가 금메달을 따면 나라가 흥하고, 혹시라도 미끄러지면 본인이 중요한 시험이라도 망친 듯 오버하는 모습 역시 없다. 왜냐하면, 담백하게도,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선수가 메달을 따면 그에게 좋은 일이지, 나하고는 별 상관 없는 일이다.

난 이 사실을 어릴 때 알았다. 롯데 자이언츠가 우승을 했는데도, 내가 마주해야 할 비루한 일상은 그대로였다. 내가 왜 그리 목놓아 응원을 했는지 회의가 들었다. 그런데 내가 이런 태도를 한국 사람들 앞에서 보이기란 쉽지 않다. 한국인이라면 응당 내가 룰도 잘 모르는 종목의 처음 보는 선수를 응원해야만 한다.

이런 미국 사람들 사이에서도 숀 화이트가 메달을 못딴 이야기는 화제였다. 거의 유일하게 점심시간에 수다 떨다 나온 올림픽 이야기였다. 숀 화이트가 워낙 대단한 스타이기도 하고, 스노우보드 또한 가장 인기 있는 종목 중 하나라 그런 것 같다. 그들 역시 쿨하게 받아들이더라. 최고의 선수인건 분명하지만 그날 운이 좀 없었나보지 하고 말더라고. 혹여 한국의 빙상스타에게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면 분위기는 퍽이나 달랐겠지.

역시 대단한 선수
지난 화요일, 평창발 뉴스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또다시 숀 화이트가 우승을 했단다. 라이브로 봤다면 얼마나 흥분됐을까. 뒤늦게 찾아본 영상을 보니, 이건 뭐 금메달일 수 밖에 없더라. 여유와 긴장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리고 비장함. 해설자의 말대로 the biggest run in his life였다. 마지막 착지를 마치고 포효하는 모습을 보니 본인도 알았던 것 같다. 지난 올림픽에서 마지막 연기를 마치고 초조해하던 모습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금메달은 금메달이고, 역사상 최고의 epic run이 아니었을까 싶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마침 하프파이프 상태도 받쳐줬기 때문에 과감히 최고의 기술을 시도했던 것이지 않았을까. 소치 올림픽 때는 하프파이프 상태가 엉망이었다고 한다. 꼼꼼한 한국 사람들이 이 국가적인 행사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치뤄낼지는 짐작이 간다. 결과적으로 하프파이프가 완벽이란다. 이건 해설자들도 칭찬하더라. 최고의 멍석이 깔렸기 때문에 초일류 선수가 자신의 기량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었겠지.

환희의 눈물을 쏟아내는 그를 보니 그가 느끼고 있을 감정의 크기가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걸어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겠지. 제작년 르브론 제임스가 우승했을 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내 심장과 눈물 피와 땀, 모든 것을 바쳤다.”

아 썅 진짜 멋있었다. 싸나이가 이렇게 함 살아봐야 되는건데. 난 무엇에 열정을 불살라봤나. 몇개 생각이 나긴 하는데 어디다 자랑할만한 건 하나도 없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멀쩡한 걸 해봐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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