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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 Life

옛친구 소식

대학 시절 아주 친했던 친구가 하나 있다. 어쩌다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결국은 알게 될 사이였다. 그저 그렇게 알았다가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될 수 있었지만, 우린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아주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 같은 동네 살아서이기도 했고, 내 사촌형이 그 친구 과외 선생님이었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난 그녀석이 좋았다. 그래서 친해진걸게다. 늦은 밤 캔맥주 하나씩 사들고 공원 벤치에 앉아 마시던 기억은 지금도 반추하는 내 20대의 소중한 추억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뜸해졌을까. 아마도 내 진로에 문제가 생기고부터인 것 같다. 그 즈음에 멀어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그러려니 하는거지. 내 인생이, 혹은 내가 망가지는 꼴을 걔는 제대로 가까이서 지켜봤다. 걔는 내가 할 수 있는 선택과 그에 따라 내가 감당해야 할 짐을 말해줬다. 아주 정확했다. 어찌 20대 중반에 그걸 알고 있었을까. 똥덩어리를 뒤집어쓰고 나니 나는 나대로 날카로와져서 주변 사람들을 잘 대하지 못했다. 걔는 그때도 내 옆에 있어줬지만, 그래서 소원해진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나는 병역특례업체에 들어가서 노예생활을 시작했고, 걔는 곧 다른 도시로 대학원을 가게 되면서 연락이 끊긴 것 같다. 걔가 그리로 간 줄도 몰랐던 것을 보면, 내 인생 망하고 나서 멀어지기 시작한게 사실인 것 같다. 이게 아쉽다. 그 친구가 가까이서 본 내 마지막 모습이란 게, 증오에 가득 찬, 제정신이 아닌 나였으니.

내 인생을 다시 궤도 위로 올려놓으려 발버둥치던 어느날이었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그 친구를 봤다. 아주 예외적인 성취를 했더라고. 난 기뻤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영업한테 치이고, 버그하고 씨름하느라 밤을 새고 있는데, 이 친구는 벌써 누구나 우러러볼 경력을 레쥬메에 추가했다.

회사에서 유능한 사람 대접 받는데 조금은 들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신문을 내려놓자 머리가 차분해진 느낌이었다. 그 친구라는 벤치마크가 있으니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하나하나 내 상황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먼저 내 인생을 내가 원하던 궤도에 올리기에는 늦었다는 걸 알았다. 그 직장에 오래 있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거기서 뭐라도 좀 해놓으면 다시 내가 원하던 커리어 패쓰를 밟을 수 있을거란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그럴 일 없을거라는 느낌이, 아니 추론이 되더라. 그리고 내가 붙들고 있는 제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몇년만 지나도 아무것도 아닌 일에 난 내 인생의 기회비용을 놓치고 있다. 이 모든게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난 이제 뭔가는 포기해야 한다.

그 친구의 연락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난 축하 메시지를 보냈고 우린 다시 연락하게 됐다. 허나 예전처럼 best buddy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기껏 경조사 몇개만 챙겼을 뿐인데, 그조차 우리가 얼마나 멀어졌는지만 느끼게 해줬다. 그는 너무 일이 잘 풀려서 바빴고, 난 상사한테 쪼임 당하고 다른 사람이 싸놓고 튄 똥 치우느라 정신 없었다. 서로 사는 도시도 달랐고, 난 곧 한국을 떠났으니까 다시 만나고 어쩌고 할 시간도 없었다.

수년 뒤, 결혼식에 초대할 사람 명단을 정리하다 걔의 연락처를 봤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옛친구를 초대하지 않기로 했다. 나도 그 친구의 결혼식에 갔었으니 초대해도 될 일이었다. 허나, 우린 4년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대화는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래 이정도면 초대를 하지 않는게 옳은 일이다.

가끔씩 그 친구 생각을 한다. 구글에다 이름을 치면 젤 위에 뜨는게 걔다. 헌데 다시 연락을 할 것 같지는 않다. 그 친구에게서 메일이라도 한통 온다면 기쁘기야 하겠지만 그런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우린 참 비슷한 사람들이었는데, 세월이 많이 흘렀고, 그동안 난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그 친구도 많이 변했겠지. 사는 나라까지 달라진 마당에 다시 가까워지길 바라는 건 욕심이다. 그냥 우린 여기까지인 것 같다. 그냥 옛 친구, 옛 기억의 한 조각이다.

그 친구를 떠올릴 때면 내 젊은 시절 잃어버린 꿈이 생각난다. 손 안을 벗어나 훨훨 날아간 잃어버린 꿈… 아쉬움 가득한 그런 존재다. 어쩌면 내가 그리워하는 건 그 친구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냥 그 시절, 야심만만한 철부지이던 그 때, 하루하루 다음날이 기대되고 설레던 그 황금같은 젊은 날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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