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imple Life

Pet Project

높은 사람이 "이런거 좋지 않나?"라고 한번 말하면, 그 아래 실무자가 "네 맞습니다. 때마침 그런거 하고 있어요."라고 화답 한번 하고 곧장 폭풍처럼 몰아치듯 하는 일을 Pet Project라고 한다. 윗선에서의 판단착오 혹은 그냥 해본 소리와 그걸 실무적으로 검토해야 할 사람의 맹목적인 충성이 빚어내는 참극이라고 할 수 있지. 좀 더 줄여서 말하자면 윗선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하는 삽질이라고 할까.

저 말이 만들어진 곳이 미국이니까 꼭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닌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나도 한국에서 겪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유학준비를 했어야 하는 시기였는데, 이 일에 말리는 바람에 아무것도 못했다. 정말 얻은게 하나도 없는 고통 뿐인 기억이지만, 나름대로 이 극한의 말도 안됨과 힘듦 속에서 갖가지 서로 다른 인센티브를 갖고 있는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극한의 환경에 들어가면 진짜 그 사람의 밑바닥을 볼 수 있다고 하지 않냐. 나름 그런 면도 있었다. 오늘 갑자기 그 때 있었던 일이 자꾸 생각난다.

처음부터 말이 되기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일은 꼬이고, 따라서 팀 분위기도 안좋았다. 그러다가 어떻게 전체 술자리 같은게 있었는데 거기서 생긴 일이다. 물론 술자리 분위기도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다. 그 침울하고 어색한 분위기에서 어느 매니저가 호기롭게 뱉은 말을 듣고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자기는 젊을 때 일도 정말 많이 했지만 놀 때도 정말 많이 잘 놀았는데 우리보고 왜 이렇게 암울하게 사느냔다. 야근을 하던 어느 날  "야 우리 강원도나 한번 갈까?" 한마디에 다 뭉쳐서 새벽에 강원도에서 술퍼먹고 다시 돌아와 출근해서는 졸았다는 에피소드를 곁들여서 왜 우리는 그런 낭만도 없이 사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되신단다.

말이 끝나자마자 난 격분해서 테이블을 내리치고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다. 프로젝트 매니저가 왜 프로젝트가 이 꼴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는게 말이나 되나. 왜 모든 사람들이 이토록 고통받고 있는지, 프로젝트는 왜 산으로 가는지 모두들 알고 있는데 혼자만 모른단 소린지. 평소에 조용히 일만 하는 이미지였던 내가 그러니까 더 놀란 모양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사람도 불쌍하긴 했다. 쉽게 말해서 좀 능력이 처지는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같이 일을 하려면 자기 일 잘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준이 좀 맞아야 문제가 없다. 특히 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그렇다. 그냥 분위기가 너무 안좋아서 그냥 헛소리 좀 한다고 한게 그런 소리를 한 건데, 평소에 자기 역할에 대해서 고민이 있었다면 나올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냥 되지도 않는 캐파에 존재감은 좀 드러내야겠고 그래서 이것저것 건드리고 이런저런 소리도 해본다는 게 저런 거였지.

이 일은 남 앞에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 볼일 없다라는 사실을 내게 각인시켜줬다. 능력이 대단한 사람은 정말 많은 경험을 하면서 거기에 따른 생각도 깊게 한다. 하지만 극소수의 천재들을 제외하고는 그렇지 않다. 이렇게 저렇게 떠벌리길 좋아한다면, 줏어들은 소리를 그냥 하는 거거나, 헛소리다. 빈수레 요란하단 옛말이 과히 틀리지가 않은거지. 더불어 옛말에 "서울 가본 사람하고 서울 안가본 사람하고 말싸움하면 서울 안가본 놈이 이긴다."라고 했는데 이 말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니다. 이것 뿐 아니라 그런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들, 말투, 행동 등등도 좀 알게 됐다. 하여튼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빈수레를 감별하는 능력만큼은 확실히 나아진거지.

이것 뿐 아니라 참 많은 일이 있었다. 하나같이 안좋은 일들 뿐이었다. 개인적인 커리어도 손해를 봤고, 건강도 안좋아졌고 등등. 하지만 인생공부는 좀 된 것 같다. 이런건 Harvard HSB나 Chicago Booth 같은 데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데 말이다. 정말 돌아보면 후회 뿐인 한 해였지만 많은 것을 배웠다. 나만 그런건지 원래 그런건지는 모르겠는데, 좋은 일에서보다 안좋은 일에서 뭔가를 더 배우는 것 같다. 지금까지 살면서 정말 내게 일어나지 말았더라면 하는 일들이 좀 있는데, 물론 개인적인 커리어나 이런 면으로는 아주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다른데서 배울 수 없는 걸 얻은게 있으니 꼭 100% loss는 아닌 셈이다.
반응형

'Simple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다림  (0) 2010.09.09
Job Interview 후기  (6) 2010.09.02
Job application 떨어지기.  (2) 2010.08.28
아파트 새로 계약하면 해야 할 일들  (0) 2010.08.25
Yellowstone에서 돌아옴  (2) 2010.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