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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 Life

천재, 그리고 그의 모범

원래 유명한데다 아주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나와 개인적인 접점이야 거의 없지만, 있다고 해봐야 'XXX씨 이거 가져다 쓰세요.' '네 감사합니다' 수준의 이메일 교환해 본 게 다이니 날 기억하고 있을 리는 절대 없고, 잘 아는 주변인들은 제법 있다. 그들에게서 들려오는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냥 천재다. 그리고 객관적인 성취로 이미 그걸 증명했고 말이지.

그 사람의 인터뷰를 봤는데 본인이 크게 성장한 계기를 주었던 어느 사람을 언급하더라. 그 분 이야기를 한 게 처음도 아니니까 본인이 좋은 쪽으로 큰 영향을 받은 게 사실인 것 같다. 나도 그 이야기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분은 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한 때 내 상사셨던 Y박사님이다.

내 상사시긴 했어도 인사적인 관리만 받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일을 같이 많이 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드물게 훌륭한 분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능력과 인품 이 모든 면에서 말이다. 그 분을 생각하면 먼저 특유의 차분함이 떠오른다. 안타깝게도 그 분은 나를 그리 높게 평가하진 않으셨다. 같이 일을 많이 하지 않아서 그런가 싶다가도 그 얼마 안되는 일을 같이 하면서도 그렇게 똘똘한 인상은 못드린 것 같은데 그건 뭐...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내가 그냥 그런 거지.

그 분을 직접 뵌 것은 미국 오기 전 날이 마지막이다. 내가 유학 가는 건 이미 아시고 계셨고, 난 인사만 드린 것인데. 내 앞날의 행운을 빌어주셨다. 따로 연락을 드린 적도 없고 페이스북 같은 것도 안하시고 해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모르다가 다른 분을 통해서 소식을 전해들었다.

경영진이 그 분께 뭔 프로젝트를 시켰는데, 이게 뭐 전형적인 pet project인지라 일은 물론 그거 하는 사람까지도 말아먹을 게 뻔했다. 똥오줌 못가리고 그걸 넙죽 받아서 할 수도 있겠고, 핑계 대면서 시간만 질질 끌 수도 있겠고, 그냥 눈치 봐서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튈 수도 있다. 그 분은 그러시지 않았다. 프로젝트를 거부한 것이다. 당연히 경영진에서는 안좋아하지. 본인의 판단에는 이건 안 될 일이었고, 경영진에게 미움받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게 진짜 엔지니어로서의 자존심이 아닐까.

통제 불능의 똥고집 뭐 이런 게 아니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 판단을 드러내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본인의 직을 걸고 용기를 내신 거였고, 결국 그 조직에서 나와야만 했다. 결국 누가 옳았는지, 누가 똥고집을 피운 건지는 머지 않아 밝혀졌다. 때론 밖에서 볼 때는 당연해 보여도 조직 안에서 그렇게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가 않다. 좀 안타까운 결말이긴 한데, 그 정도의 능력자는 찾기도 쉽지 않고 노리고 있는 곳도 많다. 하지만 애초에 경영진이 그 분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를 돌아봤으면 좋았을텐데 뭐... 이제 다 지난 일이고, 원래 제 정신 붙은 사람은 제 정신 안붙은 사람 밑에서 일 못한다. 언젠가는 저렇게 터질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분과 좀 더 가까이서 일을 많이 하고 더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는 게 아쉽다. 언젠가 다시 같이 일을 할 기회가 있을지. 한국에 계시니까 현실적인 바램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사실은 나도 나름 역량이란 게 있는 사람이라고 어필해보고 싶기도 하고. 그 분을 좋은 본보기로 여기는 사람이 그 유명한 천재 뿐 아니라 나 같이 미미한 사람도 있다는 걸 아실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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