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 깁슨 감독의 영화 중에 '헥소 고지'라고 있다. 난 이 '헥소'가 뭔지 몰랐다. 아니 알 필요가 없었지. 영화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뭔가 뜻이 있으면 대충 빡센 거겠지 하고 말았지. 아.. 진짜 이게 뭔지를 알고보니 정말 빡세긴 빡세더라.
이 집에는 예전 주인이 TV를 걸었던 벽이 있다. 벽걸이 마운트는 물론 거기에 썼던 나사까지 남겨두고 TV만 떼갔다. 같은 크기의 TV를 사서 걸 수 밖에 없는 운명을 만난 것이지. 이번 Black Friday에 TV를 샀고 설치 서비스는 쿨하게 거절했다. 그렇게 며칠 후 TV가 배달되어 왔고, 빨리 좀 하라는 마누라의 등쌀에 드라이버를 집어들었다. 참 세상 일이라는 것이 예상대로 되는 게 드물더라.
첫번째 문제는 나사였다. 그 나사가 안맞더라. 그거야 뭐 동네 하드웨어 스토어에 가서 해결을 했다. 이렇게 퉁치기엔 제법 고난을 겪었지만 뭐 그걸로 불평하며 여기 글을 쓰고 있다면, 이미 팔만대장경을 집필했을 터. 뭐 별 일은 아니었다. 이 나사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문제는 TV 마운트의 브라켓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사진부터 보자.
정말 난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아니 지나치게 멍청한 디자인 아닌가. 같은 브랜드의 TV를 10년 전에 샀는데 여긴 이런 문제가 없다. 예전 제품은 백 패널이 금속인데 새 TV는 플라스틱인 건 뭐 원가 절감하느라 그랬다 치더라도 디자인이 퇴보하다니.. 내가 고객센터에는 말을 점잖게 했는데 속에서는 온갖 육두문자가 다 올라왔다.
잠시 머리를 식힌 후에 그럼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생각해봤다.
1. TV 제조사에 연락해서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는 power cord를 구한다.
2. 1이 안되면 TV 마운트 제조사에 연락해서 조금 짧은 브라켓을 구한다.
3. 2도 안되면 하드웨어 스토어 가서 브라켓을 자른다.
4. 3도 안되는 상황이라면 직접 브라켓을 자른다.
5. 새 TV 마운트를 설치한다.
솔직히 나는 1, 2번에 대해서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고 예상대로 그런 거 없었다. 브라켓을 자를 궁리를 하는데 문득 다른 주에서 애들 가르치고 있는 친구가 생각나더라. 그 친구 실험실에는 이런 저런 장비 다 있을테니 자를 수 있겠구나. 하지만 그거 하나 자르러 거기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여간 나는 여기서 잘라야 한다. 하드웨어 스토어에서 나무나 PVC 파이프는 잘라주는 게 확실한데 이렇게 튼튼해보이는 쇳조각은 어떨지 확신이 없었다. 내가 혼자 자르는 것도 영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라스트 리조트로 새 TV 마운트 설치를 고려해봤다. 그런데 이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드라이월을 나무로 보강을 해야하기 때문에 제법 큰 공사가 될 게 뻔했다.
제발 하드웨어 스토어에서 이걸 잘라 줄 수 있기를 바라며 전화를 돌려봤는데, 해준다는 곳이 아무데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새 TV 마운트로 내몰리는 상황... 허나 이미 붙어 있는 마운트가 좀 특이하게 생긴 탓에 드라이월을 보강해야 한다. 머릿속으로 설계를 해보다가, 집에서 이 튼튼한 브라켓을 자르는 게 가능은 한가 싶어서 검색을 해봤다. 이 때 튀어나온 게 바로 헥소 hacksaw 이거다. 보자마자 바로 감이 왔다. 헥소 고지가 여기서 왔구나. 어차피 내가 혼자서 못 자르면 새 거 사야 하니까 시도나 해보자 싶어서 $17 주고 헥소를 샀다.
유튜브에서 배운대로, 발과 무릎으로 단단히 고정을 시키고 톱질을 시작했다. 아니 그 전에 엉뚱한 쪽을 자르는 게 아닌지 두세번 확인을 했다. 어어... 잘리긴 잘린다. 근데 존나 힘드네 이거. 입으로 욕을 해가면서 5분 가량 매달렸다. 아... 드디어 잘렸다. 시발 그래도 두 번 하라면 못하겠다. 철가루를 털어내고, 잘린 면을 테잎으로 감싸고, TV를 마운트에 걸었다. 아... 진짜... 존나게 힘들었다. 하지만 이 정도 투자해서 대 공사를 피하게 된 게 어디냐. 애들이 보면 좋아하겠구나. 그래도 TV 뒷면이 이렇게 생긴 줄 알았으면 이거 절대 안 샀다. 내 팔자에 없던 단어 'hacksaw' 그냥 모르던 채로 사는게 더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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