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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 Life

박경리의 토지 감상평

이제 9권까지 읽었다. 아직 반도 못 읽은 주제에 무슨 감상평이냐 뭐 내가 생각해도 그렇긴 한데, 그래도 느끼는 바가 있으니 좀 적어볼란다.

대단한 작품이다. 정말 대단하다. 가장 훌륭한 점은 등장 인물들의 삶이 피부에 와 닿듯이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삼국지도 좋아하고 여러번 읽었는데 왠지 판타지처럼 느껴졌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가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밥이라는 게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닐텐데 그들이 어떻게 끼니를 해결하고 먹고 사는데 필요한 것들을 해결하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현대에 비하면 생산량이 바닥을 치던 시절 아닌가. 흉년 한 번 들면 사람들이 대량으로 죽어나갈 정도로 식량이 귀하던 시절인데 가장 중요했을 그 문제를 등장 인물들 중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시대극이라기보다는 판타지로 느껴졌던 것이지.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건 삼국지만의 문제가 아니고 옛날 영웅들 이야기 그러니까 펠로타코스 영웅전 봐도 그렇다. 그냥 그리스 신화 같이 느껴졌다. 뭐 대놓고 영웅들 이야기니까 그랬겠지.

그러나 토지는 다르다. 공중에 붕 떠 있는 영웅들 이야기가 아니고,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민중들의 이야기다. 내가 삼국지 열심히 읽었다고 해서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알게 된 건 없다. 하지만 토지를 읽음으로써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느꼈다. 내가 아무리 경상도 사나이라도 토지에 나오는 경상도 사투리를 다 알아먹지는 못했다. 솔직히 좀 답답하긴 한데, 그나마도 진짜 그 시절 경상도 농촌에서는 이러한 풍경이 펼쳐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야말로 간접 경험이구나 싶네.

난 원래 소설은 잘 안 읽는다. 그럼에도 이 ‘토지’는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어느 대학 후배 때문인데, 내가 학번만 몇 개 앞섰을 뿐이지, 학점도 그렇고 사람 자체도 나보다는 훨씬 나은 아이였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프랑스 평론가가 토지에 대해서 ‘귀엽다’라고 평을 했다는 이야가 나왔고, 그 후배는 말그대로 분개했다. 토지의 그 많은 등장인물, 그들의 치열한 삶에 대해서 귀엽다고 평을 하다니. 얼마나 동양을 그리고 한국을 우습게 보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겠냐며 말이다. 나는 그 프랑스 사람을 모르고 무슨 맥락에서 ‘귀엽다’라고 말을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마 그는 1부 정도 읽은 모양인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평임은 확실하다. 나도 호박 갖고 옥신각신하는 장면에서는 좀 귀엽게 느껴지긴 했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절대 안될 말이다. 원래 사람은 별 것 아닌 인물이 아등바등 하는 꼴을 보면 ‘귀엽다’라고 느낀다.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후배는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 날 나는 그 시절 사람들의 삶을 그토록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이 ‘토지’를 꼭 읽어보겠다고 결심했다. 그걸 실행하기까지 20년이 넘게 걸렸다는 사실이 좀 당혹스럽긴 하네.

작품에 투영된 작가의 삶에 대한 통찰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냥 옛날 농촌의 장면 장면을 생생하게 그린 데서 그쳤다면 이렇게 대단한 작품이 되지 않았겠지. 나는 인생이란 신이 내게 준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거라 생각한다. 그 많은 등장인물들이 타고난 기질과 각자의 상황 속에서 여러 가지 선택을 하고 결과를 맞게 된다. 참 여러 가지인데, 그들의 대부분은 또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게 아이러니이다. 이 모든 것이 활자로 표현될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삶에 대한 통찰 때문이지.

마지막으로 문장 하나 하나가 예술이다. 진짜 어지간한 글 좀 썼다 하는 사람들의 작품과는 수준을 달리한다. 그 묵직함, 그 아름다움. 내가 즐겨 읽는 사회과학 서적에서는 절대 찾을 수 없고 웬만해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워낙 옛날 작품이라 이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거 완전 eye-opening 수준의 경험이다.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문장 하나하나의 그 정제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 때 생각이 나더라. 그냥 신문 기사나 나 같은 놈이 블로그에 싸질러놓은 것과는 뭐…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의 음식과 똥의 차이지. 아마 이 소설은 여러 번 정독하게 될 것 같다. 이문열의 삼국지는 박진감과 재미가 대단해서 여러번 읽어도 지루하지가 않았는데, 토지는 방향이 달라서 그렇지 여러번 읽기에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중학생 때 읽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격랑의 시대 속 사람들의 치열한 삶에 대한 이야기이고, 영웅이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데서 그렇다. ‘토지’를 다 읽고 나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런데 이 책을 어떻게 구하지? 영어판으로 읽으면 하세월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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