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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 Life

고부갈등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고찰

결혼을 하고나면 참 많은 것이 달라진다. 대표적으로 남자에게는 처가가 생기고 여자에게는 시집이 생긴다. 생판 모르던 사람들이 서류상으로라도 가까운 사이가 되다보니 잠재적 갈등이 지뢰처럼 깔린다. 여기서 생길 수 있는 갈등 중에 가장 흔한 것은 고부갈등인 것 같다. 오죽하면 시월드라는 말이 다 있겠냐.

뭐라 자세히 설명은 못하겠는데, 장인어른, 장모님이 꼭 직장상사처럼 느껴진다. 그동안 모르던 사람을 갑자기 가까우면서도 내 어른으로 모셔야 된다는 점에서 꼭 그렇다. 아마 며느리와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관계도 비슷할거다. 정리하자면, 잘 모르던 사이에서 갑자기 가까워져서 내밀한 이해관계를 다루기까지한다는 점에서, 사위와 처가, 며느리와 시집의 관계는 부하직원과 직장상사와의 위계와 비슷하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많이 해본 사람들은, 특히 어른의 입장에서, 이런 인간관계를 잘 관리할 수 있을 것이고 아니라면 쓸데없는 문제를 많이 만들 것이라는 게 내 가설이다.

회기분석은 커녕 서베이도 한번 안해본 가설이긴 한데, 대충 맞는 것 같다. 장인어른과 사위의 갈등보다는 고부갈등이 훨씬 흔하고 정도도 심하다. 이것은 장인어른이 보통 사회생활을 오래 하셨고 사위 되는 사람도 사회생활을 빡세게 하고 있으니 갈등을 잘 피해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대부분의 시어머니들은 사회생활(직장생활) 경험이 별로 없다. 있더라도 아버지들처럼 치열하게 하진 않았다. 그러다보니 이런 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따라서 문제도 많이 생기는 것 같다.

나도 어머니가 아내에게 똥군기를 잡으려하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평소에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별 것도 아닌 건수 노리고 있다가 잡아서 오버하는 건 잘해봐야 ‘이사람 뭐지?’하는 정도의 반응만 얻을 뿐인데 그걸 모르시더라고. 괜한 짓은 안하느니만 못한데 말이야. 자신이 윗사람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고 싶었다면 훨씬 나은 방법들이 있는데 어디서 뭔 드라마를 보셨길래 이러시나 싶더라. 뭘 기대하신 건지는 알겠는데, 효과를 보기는 커녕 애꿎은 나만 마누라한테 바가지 긁혔다.

개개인의 특성에 기인하는idiosyncratic risk도 있겠지만, 구조적인 문제(systematic risk)를 찾아보면 대부분의 고부갈등이 이런 식이지 않을까 싶다. 위계에서 자기 위치를 확실히 아는 것도 중요하고, 위치를 알았다면 거기에 맞게 처신해야 한다. 만약 그걸 확인하고 싶다면, 아니 확인해야할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도 해야할 것이고, 설령 확인하더라도 적절한 시기와 방법이 있다. 이건 누구나 조직생활을 해보면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다. 이런 컨텐츠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위계의 윗부분을 차지했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웃기고 자빠진 일들이 생기는게지. 옆에서 부추기는 시누이 같은 사람 있으면 더 스펙터클해지는 것이고.

다행히 내 장모님과 장인어른께서는 모두 직장을 오래 다니셨고, 나도 조직생활 하루이틀 한 게 아니라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버지와 아내 사이에도 이상한 일은 없었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은 일은 어머니, 시누이만 했더라고. 주변 사람들 말을 들어봐도 비슷하다. 가장 조직생활을 적게 한 사람들이 별난 일을 벌였다는게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바꿔말하자면, 사회생활 경험이 많은 시어머니를 두면 고부갈등을 덜 겪을 거라는 말이 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므로 우리 다음 세대 정도 되면 지금보다 고부갈등으로 신음하는 며느리들이 줄어들지 않을까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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