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imple Life

Notting Hill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2000년대 초였다. 유명 여배우와 평범한 남자의 로맨스 이야기라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나도 근처 살던 여배우와 어찌 잘 될 수 있을까 하는 세속적인 욕망을 가지고 고른 영화였지만, 정말 좋더라고. 미국에 왔을 때에는, 격조 높은 대사가 많으니, 영어를 좀 배워보려고 보기도 했다. 그리고 어제, 아무래도 직접 노팅힐이라는 동네를 밟아보고 왔으니 느낌이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 다시 봤다.

 

진짜 느낌이 다르긴 다르더라. 노팅힐에서 내가 봤던 거리가 그대로 다 나온다. 동네 설명도 내가 아는 바로 그대로를 묘사하고. 거기 나온 다른 동네도, 바로 내가 보고 온 그 분위기더라고. 그런 세세한 것들이 영화에 더 몰입시켜주는 것 같다. 나중에 다시 Portobello Market에 가서 앤틱 물건을 사오겠다고 다짐했다. 마누라를 설득하는게 쉽진 않겠지만.

 

몇번을 봐도 정말 잘 만든 영화다. 줄거리는 뻔한데, 그걸 설득력 있게 풀어간다. 작은 에피소드 하나 허투로 들어가지 않았다. 품위 있고 유려한 대사는 덤이다. 유명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우리 모두 마음의 짐을 지니고 살며 사랑에 위로를 받으며 사는 존재라는 주제가 내게 크게 와 닿았다. 뭐 이게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아닐 수도 있는데, 이 이야기가 여운이 깊게 남더라고. 그래서 두 장면이 인상 깊었다.

 

첫번째는 브라우니를 놓고 누가 더 불행한지 배틀을 뜨는 장면이다. 난 순진하게도 아름다운 외모와 부, 명성을 모두 갖고 있는 사람이 감히 거기 껴볼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여기서 엄살을 부렸다면 영화가 유치해질 수 있었지만, 이 훌륭한 감독은 절제할 때를 안다.

 

런던을 떠나는 날 줄리아 로버츠가 휴 그랜트에게 담담히 사랑을 구하던 장면도 인상 깊었다.

"The fame thing isn’t real you know? I’m also just a girl, standing in front of a boy, asking to love her."

대사만 담담한게 아니고 장면 자체도 담백하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날 어떻게 봐주는지가 아니다. 그냥 내 곁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지지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 이게 참 당연한 소린데, 나도 가끔은 이걸 잊고 산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시절엔, 난 내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했다. 고통스러운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는데, 사람들의 시선도 견디기 어려웠다. 난 내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줄 알았더니 아예 그런건 아니었던거지. 안그래도 억울해 죽을 판인데, 사람들에게 내 자신을 변호해보려 애를 쓰는 내 자신이 처량해서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들의 반응에 또 상처를 입었다.

 

어느 순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가 나를 천재로 생각한다고 해서 내 머리가 갑자기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날 거지라고 한다고 내 계좌의 잔고가 0이 되는 것도 아니다. 뭐 0이었던 시절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뭐라고 하는지는 내 인생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물론 이 영화 한편이 내 생각을 극적으로 바꿔놓은 것은 아니다. 내 주변에서 같은 이야기를 해주던 많은 작은 목소리들, 이 영화는 그 목소리들 중에 하나였던 것이지. 이 인생의 비밀을 발견하면서 나는 조금은 더 성숙해졌고, 또 행복해진 것 같다.

 

이제 난 나를 잘 안다. 내가 언제 행복하고 무엇에 행복해 하는지. 적어도 내 행복을 찾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휘둘리지는 않게 되었다. 비록 인생이 원하는대로 풀리지는 않았어도, 뭐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이걸 아는데 참 오래 걸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