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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 Life

내가 미국으로 온 이유 2 - 별 필요 없는 우수한 엔지니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오겠다는 결심을 한 이유 중에 하나는, 내가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좀 과격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회사에서 우수하다는 소리를 듣고 있었고, 여기저기 리쿠르터들로부터 연락도 많이 받고 있었는데 내가 필요 없다는게. 하지만 이건 사실이었다. 그 자리에 딱 맞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내가 미국의 회사들이 한국 회사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조직이 얼마나 멀리까지 시야를 두고 있느냐이다. 친구들하고 얘길 해봐도, 미국의 직장들이 훨씬 더 장기적인 관점을 두고 운영되고 있다. 지금 당장 뭔 하나 문제를 막고, 매출을 좀 올리고 하는 것보다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새나가는 비용을 막고 더 나은 서비스와 제품을 만드는 데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왜 이렇게 미국과 한국 회사들이 다른 시야를 두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내 나름대로 생각한 바가 있지만, 오늘은 이 차이가 어떻게 내 결심에 영향을 줬는지만 정리를 해보고 싶다.

한국에서는 왕왕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지시를 많이 받았다. 미국에서는 quick and dirty solution이라며 경원시되는 해결책을 채택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나중에 이로 인해 문제가 또 생기는지 마는지는 관심이 없다. 이 해결책이 전체적인 구조의 일관성을 해쳐서 확장성을 떨어뜨린다는 데에도 관심이 없더라. 그저 당장 뭘 보여주는게 최우선 순위에 올라가더라. 나도 처음에는 지시받은대로 하기만 했다. 그런데 내 기술이 늘고, 경험이 쌓임에 따라 이 방법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했고, 훨씬 나은 대안이 있음을 알게 됐다.

그런데 이 대안은 묵살당하기 일쑤였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해줬으면 하는 엔지니어가 문제점을 늘어놓기 시작하면 시키는 입장에서는 귀찮다. 이것만 좀 해줘서 팔아먹으면 당장 내 앞으로 공이 쌓이는데, 뒷일이야 마땅히 이 천한 엔지니어들이 몸을 불살르든 어쩌든 알아서 하는거고 말이지. 여기다 대고 불평불만을 늘어놓다니 판을 깨자는거야 뭐야. 눈치 없는 새끼. 뭐 이래 되는거다 진짜. 이러니 고분고분하게 말만 잘 듣거나, 아직 문제점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편한거다. 결국 나이 좀 찬 엔지니어를 신입 직원으로 갈아치우는게지. 이런거 많이 봤다. 뭐 나도 한 때는 다루기 쉬운 젊은 엔지니어였지.

황당한 일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 중에 심한거 하나만 적어보자면, 6개월은 걸릴 제품을 단 3주만에 하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나마 1주만에 하라는 걸 내가 우겨서 3주로 늘린거다. 난 솔직히 시제품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 그걸 실제 쓸거라는 소릴 듣는 순간, 죽음의 행진이 시작될 걸 알았다. 엔지니어 갈아넣는 걸로 해결이 말끔하게 되면 모르겠는데, 뭐 그럴 리가 없지. 첫단추 잘못 꿰면 좆되는거다. 결국 시간도 훨씬 더 많이 걸리고, 사람은 오지게 갈아넣고 제품도 너덜너덜하게 되고 말이야. 난 다행히 중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하러 빠져나오긴 했는데, 그 전에 겪은 일만 해도 뭐 고통 뿐이다.

당장 제품/서비스 개발 실적, 판매 실적 이런데 목매기 시작하면 이래 되는거다. 그 서비스가 개발 후에 얼마의 비용을 먹었는지도 함께 봐야 할텐데, 그 일을 밀어붙였던 영업은 이미 그 때에는 회사를 떠나고 없다거나, 황당한 지시를 내렸던 PM은 이미 다른 프로젝트로, 회사에서는 유능한 줄 알고, 옮겨가서 똑같은 짓 하고 있다거나 하는 일이 다반사다. 본인들도 그렇게 될 줄 알고 똥 싸고 튄거지. 하기사 그럴줄 알만한 역량이 없었던 사람도 제법 봤다.

엔지니어 출신이 매니저로 올라가면 이런 일을 막을 수 있다고 사람들이 착각을 많이 한다. 어떤 엔지니어가 매니저가 되느냐에 달려 있다. 슬프게도 조직은 조직의 수준에 딱 맞는 사람을 좋아한다. 저런 조직에서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설계를 할 줄 모르고, 매일 당장 닥친 일 땜빵만 평생 하다가, 그게 세상의 다인 줄 아는 사람에게 힘이 실리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이 승진해서, 똑같은 짓만 하는거다. 그렇게 된 사람, 그렇게 될 사람이 딱 보이더라.

정말 훌륭한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경쟁이 치열한 분야에서는 내가 앞서 말한 일이 드물고 훌륭한 엔지니어가 대접을 받는다. 삼성전자의 일부 부서, LG 화학의 일부 부서들이 예가 되겠다. 일부러 B2C, B2B를 하나씩 꼽아봤다. 스마트폰에서 앱이 잘 안돌아가면 사람들이 안사니까 잘 돌아가는 CPU를 디자인해야 한다. 배터리 성능이 구리다면 아무리 앨런 머스크한테 술을 많이 사줘봐야 테슬라에서 안사줄 게 아닌가. 이 바닥에서 잘되려면 제품을 잘 만드는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조직이 한국에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늘어나고는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하여간 내가 있던 곳은 그렇지 못했다.

내가 느낀 가장 심각한 문제는 내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Quick and dirty solution이란 빠르고 지저분할 뿐 아니라 쉽기도 하다. 당장 다른 것들 무시하고, 다른 문제가 생기건 말건, 이것만 어떻게 되게 하는건 쉽다.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갖고 있어도 이런걸 하면 써먹을 수가 없다. 나는 전체 제품을 아우르는 시야를 갖고, 이걸 안정적이고 확장성 있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 나는 내 가치가 여기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요구받은 것은 땜빵이었다. 물론 같은 땜빵이라도 내가 신입직원들보다는 조금은 더 안정적이고 빠르게 해내기 때문에 위에서 나를 좋아했고 돈을 조금이라도 더 준 것 같다. 체력이 좋아서 밤도 잘 새고 말이지. 이게 그들이 생각하는 내 가치였다. 회사가 생각하는 내 가치가 내 스스로의 가치와 다르다는 건 충분히 떠날만한 이유가 된다.

또 중요한 이유 하나 더 들자면, 하는 일이 내게 도움이 안되었다. 난 이미 땜빵, 삽질 많이 해서 도움이 될 수준은 한참 넘어 있었다. 비유를 하자면 수학을 전공하는 학부생에게 초등학교 3학년을 위한 공문수학을 풀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문제는 내 상사께서도 충분히 알고 계셨다. 그분은, 개인적으로는, 나의 성장을 응원해주시고 지원해주고 싶어하셨다. 그렇다고 해도 뭐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더라고. 결국 이게 내가 그 직장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계기가 되었다.

세번째 이유는 스트레스였다. 분명히 이 산이 아닌데 올라가야 하는 스트레스였다. 이길로 가봐야 훨씬 멀리 둘러 가야할 뿐이라는걸 잘 아는데도 가야했다. 꼭 군대에서 말도 안되는 지시가 내려와도 해야하지 않은가. ‘이걸 왜 해야하나.’, ‘이거는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닌데.’ 등등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그런데 자꾸 생각하면 스트레스만 받는다. 그러니 아예 생각을 안하게 된다. 이게 군대에서의 처세방법이고, 이래서 군대 갔다오면 머리가 돌이 된다는 소리를 하는거다. 허나 이건 내 커리어 아닌가. 생각이란 걸 없애고 사는 사람도 보긴 했는데, 난 그럴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오니 내가 거기서 하던 일 계속 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내 상사께서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계셨다. 내가 미국 간다고 했을 때, 뭐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신 듯 했다. 나도 내가 거기 있으면 어떻게 될지 끝이 보이더라. 그 쯤에서 마무리하는게 적당히 아름답게 헤어지는 길이었다. 나도 상사께도, 내 동료들에게도 말이다.

작년 이 때 한국에 가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의 근황을 살펴봤다. 정말 실소가 나올 정도더라. 이 대단한 인재들을 데리고 도대체 뭘 한거야? ‘제품 경쟁이 치열한 동네’로 건너가서 눈에 띄는 경력을 쌓아가고 있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그 말고도 다른 뛰어난 사람들도 또 있었다. 제대로 환경만 갖쳐줬었어도 더 높은 성취를 했을만한 사람들이었는데 그저 소모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난 미국에 잘 온 것 같다. 직장에서 일이 합리적으로 진행되니까 편하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내 의견도 개진할 수 있고, 거기에 거짓으로 답을 주는 매니저도 없다. 내 가치도 인정을 받고 말이지. 한국에 남았어도, 이런 문화를 갖고 있는 조직을 찾을 수는 있었을거다. 그런 곳에서 일하는 전 동료들이 많이 있으니까. 허나 그런 곳이 흔하지도 않고, 거기서 날 원할지도 미지수고. 무엇보다 난 유학도 해보고 싶었으니까 미국으로 오는게 바른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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