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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 Life

형편없는 나의 안목

쿠팡이라는 회사에 대해서 처음 들은 것은 아마 2010년 정도 되었을 때다. 아주 친한 친구가 잘 아는 사람이 거기 파운더 중 하나더라고. 그 친구가 그 회사 이야기를 하면서 내게 이런 얘길 해줬다.

"너 같은 놈이 골방에서 코딩하고 있을 때 그 사람들은 고위 공무원들을 만나고 다니며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방법을 찾고 있을 거다. 스타트업도 그렇게 해야 된다."

엔지니어 몇 명 모여서 아이디어 하나 갖고 코딩하다가 죽도 밥도 안 된 사례를 좀 알고 있어서 저 말이 맞다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얄미운 감정도 들었다. 나나 대부분의 내 친구들은 현실적으로 닿을 방법이 없는 길 아닌가.

그리고 몇 해 후에 대학 동기로부터 이 회사 이야기를 들었다. 학과 선배 하나가, 그 사람은 내 선배이기도 한데, 그 회사에 조인했단다. 미국에서 시민권까지 딴 사람인데, 외국인 신분으로 다시 한국에 가게 되었다네. 연봉은 예전에 받던 그대로에 자녀 학교와 주거를 지원받는 조건이란다. 그 땐 소셜 커머스 기업 중 하나 정도로 취급받고 있었는데, 한국의 아마존이 되겠다는 비전은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나에게 이게 실현 가능한 목표로 보이냐고 묻길래 난 이렇게 답했다.

"아무리 전자상거래라도 유통업에서 신생 기업이 자리를 잡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고, 내가 그 선배였다면 그냥 미국에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자본과 네트웍을 동원하고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참 슬픈 일 아니겠느냐."

내가 한국 유통업에 대해서 자세히 데이터를 뽑아보거나 그 회사의 재무제표를 뜯어본 것도 아니고 순전히 감으로 한 말이었지만, 온갖 데이터를 다 찾아봐도 비슷한 결론을 내렸을 것 같다. 이유야 많다. 유통업은 이윤이 박하고,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며, 이미 포화된 시장이다. 게다가 경쟁사들은 대충 대기업들. 그 당시만 해도 사업 모델이 경쟁사들과 차이가 나는 부분도 없었다는 점까지 고려해보면 신생 회사가 비집고 들어갈 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예상이 보기 좋게 틀렸네. 이번에 상장을 하면서 평가받는 회사 가치가 무려 400억 달러 근처라니 말이다. 물론 내가 그 때 생각한 것 중에 틀린 것은 없다. 훌륭한 경영진이 어려운 문제를 풀어낸 것이지. 여러 자원이 예외적으로 풍족하게 지원되었던 것도 사실이나 그걸 이용해먹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나 같은 범인의 눈에는 그저 훌륭하다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아마 김범석씨는 애초에 한국의 아마존이라는 사업 모델에 대한 비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꿈을 실현시키는데 적당히 유통업 좀 아는 사람과 나 비슷한 엔지니어 몇 명 데리고 골방에서 코딩부터 시작했으면, 아무리 이게 진짜 미국 아마존이 시작한 방식이긴 해도, 내가 아는 다른 망한 스타트업과 별로 다르지 않았겠지. 그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곳에서 고관대작 자제분들을 만나 합류시키고, 지금 성공하기 위한 방법도 배웠겠지. 본인 스스로가 뭐가 필요한지 분명히 알았을 것 같다. 그것들이 갖춰지자 대규모 투자를 이끌어내고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비전을 갖고, 그를 위한 준비를 한 후, 과감히 실행하여 이루고 마는 것이 참 멋있다. 인생 그렇게 한번 살아봐야 하는데 난 뭐하고 있는지... 어쩌면 내가 이러고 있는 것은 안목이 없어서일 수도 있겠다. 내가 세상을 바꾸는 저 비전에 동의했다면 최소한 저기 조인하려는 시도는 했겠지만 내 판단은 정 반대였으니까. 지금까지 그러했던 적이 여러번이지. 그릇이 안되면 좋은 기회가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이 바로 나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나도 뭔가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하게 될지 아니면 그냥 이렇게 살면서 애들 키우고 할지. 뭐 어찌 되더라도 그냥 내 그릇에 합당한 인생을 사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면 아쉬울 일도 기쁠 일도 없겠지. 다만 나도 뭔가 하나 세상에 기스 자국이라도 남기고 싶은데... 마냥 내 욕심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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