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마지막으로 본 CSO 공연은 첫째 아이가 4주 됐을 때 열렸던 라비니아 콘서트였다. 그니까 콘서트 홀은 아니고 잔디에 앉아서 듣는 거였지. 거기 간 건 좋았는데 애기가 똥을 싸는 바람에 뭐 진짜 무슨 음악을 들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이제 음악회 같은 건 내 인생에 없다 치고 산 지가 벌써 6년이 다 되어가는데, 어쩌다가 기회가 생겨서 키신 형님을 알현했다. 게다가 아주 좋은 좌석에서 말이다.
오랜만에 뵌 형님은 좀 연륜도 붙어 보이고 머리 숱도 좀 줄어든 듯 했다. 그러나 연주만은 천인무봉의 경지에 그대로더라. 아니 더 발전된 것 같다. 형님이 연주하시는 라흐마니노프를 처음 들었는데, 역시 내가 한 두 마디 덧붙이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엇보다 형님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는 게 인상적이였다. 이전보다 콘서트 자체를 즐기시는 것 같아 보였다.
아무래도 자리가 좋다보니까 손놀림과 패달링이 잘 보였다. 완벽한 하나 하나의 터치를 보고 있자니 문득 저 손등에 페이퍼 컷이라도 생기는 게 내 맹장이 터지는 것보다 훨씬 큰 일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있자니 좀 슬프기도 한데, 이렇게 대단한 분의 연주를 여러번 본 것은 분명히 내 자랑거리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들려온 음악은 재기발랄하기 그지 없는 모차르트였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나는 피아노를 꽤 오래 연습을 했다. 피아노 연주에 있어서는 the best version of me를 이루려 했다. 아니 그냥 나는 피아노를 잘 치고 싶었다. 현실은 뭐… 재능이 어지간히도 없었나 싶은데, 그래서 그런지 나는 전공한 사람이 들려주기만 하면 대충 다 쉽게 감동을 받는다. 이런 나에게 예브게니 키신이라니. 모든 터치에 다 감동을 받는 게 너무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간혹 이 가수는 이 장르 밖에 못해. 이 연기자는 이런 연기 밖에 못해 뭐 이런 식의 평론을 접한다. 근데 내게는 별로 정당하게 들리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100점짜리의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는 일을 해서 세상에 뭔가 가치를 더한다는데, 자기보다 더 잘 하는 사람이 많은 일을 해서 80점짜리, 그러니까 대충 준수한, 결과를 내놓지 않는다는 게 어떻게 비판의 대상이 되는가? 휴 그랜트가 몸을 키워서 그저 그런 액션 히어로 연기를 하는 게 과연 훌륭한 일일까? 그냥 그런 건 다른 배우가 하도록 놔두고 본인이 잘 하는 능청스러운 바람둥이 역할을 한 번 더 하는 게 영화계 전체로도 더 효율적이고 바람직한 일일텐데 말이다.
바흐와 모차르트를 연주하는 키신 형님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난 스페셜리스트가 팔색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인이 잘하는 걸 해서 세상에 뭔가 더 하는 게 뭐 어때서. 비교우위 무역도 그런 거고 말이지. 정말 바흐를 바흐스럽게, 모차르트를 모차르트답게 연주하시는 걸 보며, 정말 연주는 황홀하기만 했는데, 과연 키신 형님이 추구하시는 음악의 길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혹시 피아노 연주에 있어서 팔색조를 추구하는 건지. 그런데 근육을 키운 휴 그랜트 느낌이 나기는 커녕 너무나 완벽한 연주였다. 이 천진난만함과 비장함은 무어란 말인가. 모차르트로도 세상에 뭔가를 더 할 수 있고, 라흐마니노프로도 그럴 수 있다면 이거야말로 the gift of music이 아닌가 싶었다. 내년 프로그램은 베토벤이라는데 도저히 놓칠 수 없을 것 같다.
아무래도 애들을 키워서 그런지 콘서트에 온 애들한테 눈길이 가더라. 그 중에는 우리 첫째보다 어려보이는 아이도 있었다. 뭐 냅다 자버리긴 했는데,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걸 보니까 우리 애도 여기 데려와도 되겠단 생각이 들대. 다음 달에 조성진이 온다니까 마누라는 둘째하고 집 지키고, 첫째는 나하고 CSO 오는 걸 진지하게 고려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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