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와인이 오래되면 될수록 좋은 줄 알았다. 이 믿음의 기원을 따져가보면 황당하게도 국민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몇 학년 땐지는 모르겠는데 그 때 선생님이 그러더라고. 프랑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좋은 와인을 한 병 사서 방구들 안에 묻는단다. 그리고 그 아이가 성인이 되면 그 와인을 꺼내 준다네. 20년씩 묵혀야 좋은 와인이 된다면서. 사실 그 때도 긴가민가 했다. 너무 비효율적이잖아. 와인 선물 때문에 방구들을 두 번씩이나 깨야 된다는 게.
근데 1980년대 국민학교 선생님이면.. 뭐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와인하고는 가까울래야 가까울 수 없는 사람 아닌가. 뭐 하여간 선생님이 악의를 갖고 애들한테 뻥을 친 것 같진 않지만 대충 아무 소리 해도 애들이 모르니까 괜찮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싶다.
각설하고, 난 21년 된 와인을 시음할 기회가 있었다. 지금도 저 와인이 나오는데 $20-25 정도 한다. 싸구려 와인은 아닌 것이지. 근데 뭐… 호기심에서가 아니라면 굳이 먹을 필요 없다.
일단, 색깔부터 불길했다. 그래도 세월을 생각하면 보관이 꽤 잘 된 것이긴 한데, 무거운 붉은색은 살짝 옅어지고 갈색 빛이 도는 것이 ‘나 산화 좀 되었소.’라고 친절하게 알려주더라. 향을 맡아봤다. 뭐 와인 냄새가 나긴 하는데, 상쾌한 과일향이나 오크향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 다음으로 맛을 봤다. 알코올은 확실히 있지만 내가 알던 와인 맛이 아니더라. 알던 맛은 아니라도 또 다른 미덕이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런 것 없수다.
이 맛을 위해서 적당한 와인을 사다가, 20년 동안이나 재워두는 건 지나치게 미련한 짓인 것 같다. 무슨 대단한 걸 수집용으로 하면 모르겠는데 맛있는 와인을 마시는 게 목적이라면 그냥 사서 빨리 마시는 게 정답인 것 같다.
이렇게 돼버린 이유는 산화 때문이다. 아무리 코르크 마개로 막아두고 차가운 와인 셀러에 눕혀두더라도 조금씩은 산소가 들어가고 화학 반응이 일어난다. 코르크 마개가 짧았더라면 더 결과가 안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향도 날아가고 맛도 저래 되는 것이지. 아주 어린 와인이라면 이런 과정으로 어느 정도 숙성이 되기도 한다. 아직 소화되지 못한 당분이 있다면 발효도 마저 끝내고. 근데 그래봤자 미미한 수준이고20년이면 뭐 그냥 숙성 수준을 넘어선 것이지.
집에 와인을 50병 정도 재워두고 있는데, 빨리 마셔버리든지 남 주든지 해야겠다.
하여간 막연하게 전설로 떠도는 소리 중엔 맞는 게 없다니까. 어쩌면 오래 묵은 된장도 별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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