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써의 소설가’에 보면 오리지널리티를 다룬 부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뭔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면 뭔가를 추구하는 자신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보라고 말이다. 이건 백번 맞는 말로 난 이렇게 뭔가 드라이브를 걸고 있지 않은 상황, 그런 압박이나 의무감도 없는 상황에서야 그 사람의 본 모습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오리지널리티라는 측면 뿐만 아니라 그냥 결과물만 봐도 이 쪽이 더 낫다. 그냥 내 속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쓴 글과 누가 쓰래서 쓴 글을, 그러니까 학교 다닐 때 억지로 쓴 독후감 같은 것, 비교해보면 간단하다.
비단 나 뿐만이 아닐 것 같은데, 인간이라는 동물 자체가 더 많은 것을 바라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 같다. 더 많은 돈과 명예 그리고 물건들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에는 뭘 또 벌여볼까 궁리하면서 산다. 이게 향상심으로 이어져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측면은 분명히 있다. 허나 항상 그렇지는 않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때로는 뭘 좀 내려놓고 주변 정리를 하는 게 최소한 내 삶의 질에는 더 좋다.
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 자신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바쁘게 산다. 당장 일상적인 일을 제외하고 봐도 여러 일이 떠오른다. 아이들과 액티비티를 한답시고 테니스를 배우고 있다. 얼마 전에는 와인을 빚어서 병입을 했는데 이게 2년째고 올해도 또 할 거다. 정원도 가꿔야 하고, 물고기도 거의 나 혼자 키운다. 그리고 책도 봐야하고 여행 다녀온 사진도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어야 된다. 여기다 내 일상을 더하니 이거 뭐 피곤할 수 밖에 없다. 뭔가 좀 내려놓을 필요를 느낀다.
그러나 난 내려놓을 수가 없다. 일을 안하면 밥을 먹고 살 수가 없다. 테니스도 나는 하나도 안 하면서 아이들에게만 연습하라고 잔소리를 하면 뭐가 되겠나. 물고기도 사실 애들 때문에 키우는 거다. 비록 얘네들이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지만, 물고기 밥이나 안 쏟으면 다행이고,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여행이나 다른 활동들도 사실 마찬가지다. 나 때문에 하는 게 아니다. 내 아이들은 지금 한창 새로운 것을 구경해보고 호기심 가는 걸 해봐야 하는 나이다. 내려놓는 건 어른이 되어서나 하는 거고 지금 얘네들은 한창 더하고 더하고 떠 더해야 하는 시기인 것이지. 그리고 나는 그걸 지원해주는 역할을 하는 건 바로 나고 말이다.
이런 이유로 나도 아직 뭘 내려놓고 할 때가 아닌 것 같다. 아이들이 좀 더 크면, 사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내려놓을 게 있는지를 고민해보아야겠다. 지금 하는 것 중에 애들하고 상관없는 건 친구하고 와인 빚는 것 밖에 없는데, 아 시발 이걸 내려놓을 수는 없지. 진짜 나도 숨구멍 하나는 있어야지.
‘직업으로써의 소설가’ 이 책은 하루키의 책 중에서도 아주 좋아하는 편이다. 작품에 문득 문득 하루키 형님의 인생관이나 삶에 대한 태도가 나오기는 하지만 이건 대놓고 본인이 갖고 있는 직업관에 대한 책이다. 소설가라는 게 본인의 정체성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할 수 밖에 없는 일이고 보면 이렇게 직접적으로 본인의 생각을 표현한 책이 또 없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자신이라. 진짜 이 문장을 읽으면서 감탄했다. 나도 평소에 그리 생각해왔다. 뭔가 의무감에서부터 벗어난 때에 그 사람의 본 모습이 나온다. 배우는 걸 좋아한다고 입으로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실제로 그런가는 잉여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을 때 밖에 없다. 평소에 뭐라고 말하고 다녔는지는 상관없다. 그 시간에 쳐 드러누워서 넷플릭스만 본다면 그 사람은 배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시간 뿐 아니라 뭔가 추구해야 할 필요가 사라졌을 때, 잉여 자원과 힘이 생겼을 때 어디에 쓰는가가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말해준다. 링컨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으면 권력을 줘봐라” 이렇게 말한 적이 있는데 그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 근데, 진짜 나는 잉여 자원이나 힘이 없네. 그런 게 생겨봐야 진짜 나를 파격적으로 알게 될텐데 이대로 평생 모르고 살게 되는 건 아닌지 불안하다.
'Simple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날 빼다 박은 우리 둘째 (0) | 2024.09.17 |
---|---|
안타까운 새 물고기들 (2) | 2024.09.04 |
Lake Michigan Circle Trip - Sheboygan / Milwaukee (0) | 2024.08.22 |
시카고 한인 축제 (0) | 2024.08.15 |
Lake Michigan Circle Trip - Green Bay (0) | 2024.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