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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 Life

외줄타는 현대인2

지난 Labor Day 때 한국 마트로 장을 보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어떤 아저씨가 "직장에서 쫓겨났다. 3살된 아이도 있으니 좀 도와달라"는 팻말을 들고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이었다.

사실 미국의 번영이라는 것이 상당부분 개인의 희생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80년대 이후로는 개인들의 삶을 위태롭게 만들면서 질주해온 것이 미국의 경제, 다시 세계의 경제다. 여기 구태여 통화정책과 금융규제,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논하진 않겠다.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들이 써놓은 글이 많을테니.

그냥 나만 보면 그렇다. 내가 가진 모습 중에 일부만 작정하고 보여주면 대단히 잘나가는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 자신이 있다. 그런데 직장을 잃는 순간 나는 얼마나 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마 6개월도 못버틸 것이다. 산술적으로는 더 버틸 수 있지만, 사람이 딱 통장이 바닥이 나야 생활 패턴을 바꾸진 않으니까. 그런데 내게 3살짜리 핏덩이가 있다면 나도 별 수 없이 저런 팻말을 들고 내가 자주 다니던 길에 서 있을지 말지를 고민할 것이다.

그럼 내가 직장에서 어떻게 하면 잘릴지, 잘리고 나서도 어떻게 해야 직장을 구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봤다. 뭘 모르는 사람이야 내가 일 못하면 잘리고 내가 잘나면 재취업이 쉽게 될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이 직장에서 잘릴 때 일을 못해서 잘리는 일은 사실 별로 없다. 대부분 사업부가 정리되거나 축소되면서 정리해고가 일어난다. 이런 일은 언제 생기냐면, 경기 침체나 산업 트랜드 변화, 리더의 오단 등 몸담고 있는 조직이 기울 때 생긴다. 여기서 누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느냐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잘 아는 어떤 사람은 꽤 유능한데도 불구하고 회사의 필요에 의해서 팀을 옮겼는데 갑자기 그 팀이 속한 사업을 접으면서 정리해고가 되는 경우도 봤다. 정말 재수가 없었다. 정말 직장에 붙어있고 말고를 정하는 것에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직장을 구하는 것도 그렇다. 내가 지원하는 분야로 사람을 뽑아야 내가 직장을 구할 수 있다. 내가 잘나서 직장을 구했다기보다는 때마침 나같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 자리가 있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걸 난 잘 안다. 물론 개인이 좀 더 박터지게 준비하면 확률을 높일 수 있긴 하다. 하지만 고용시장 자체가 얼어붙는다면 길에 쏟아진 막대한 실업자들 구제는 요원하다. 다시 말해 실업문제를 실업자들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무식하고 용감한 짓이다.

벌써 몇년 전 일이다. 내가 처음으로 '어쩌면 내가 지금껏 한 일들 중에 내가 컨트롤을 갖고 있었던 부분은 10%도 안될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당시 나는 꽤 유능한 사람 대접을 받고 있었고 몸담고 있던 팀도 참으로 잘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산업 변화를 읽고 그 팀에 들어갔던 것도 아니고, 우리 팀도 어쩌다보니 그 방향으로 간 것이었다. 물론 난 열심히 일했고 다른 누가 내 자리에 있었다면 얼마나 성과를 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하지만 내가 하던 일이 잘 되었던 것은, 우리가 나가던 방향과 제공하던 서비스가 어떻게 산업 변화에 잘 맞아들어갔기 때문이다.

내 인생이 오지게 말렸을 때도 따지고보면 내가 크게 잘못한 것은 없었다. 물론 내가 선견지명을 갖고 오만 것들을 다 예측했더라면 그런 똥은 피해갈 수 있었겠지.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그런걸 다 알겠나. 나는 주어진 상황에서 reasonable한 노력과 고민, 그 이상을 쏟아부었을 뿐이다.

그 아저씨를 보면서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얼마나 위태로운가. 나 자신이. 그 아저씨와 내가 겉보기엔 달라보이지만, 사실 별 차이도 없다는 걸 난 너무나 잘 안다.

이런 불안감이 있고 없고가 팔짜가 좋고 나쁘고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진 않을까. 내가 좀 잘못되어도 내가 돈 많은 집 자식이어서 완충해줄 버퍼가 있다면 삶이 이렇게 위태롭지는 않겠지. 그러면 만성적인 불안을 느끼지도 않을테니. 어릴 때부터 좋은 집안 자식들을 보며 딱히 부러워해본 적은 없는데 이런 불안을 느낄 때마다 내게 그런 배경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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