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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 Life

나와 화해하기

어릴 땐 그렇게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 그래서 내가 열심히만 하면 뭐든 할 수 있어."

그래서 인생 좆된 놈들 이야기를 듣거나 보거나 하면, 우습게도 그 사람이 열심히 안하거나 재주가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렇게 나이브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공부 잘하고,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 잡고, 뭐 대부분 이렇게 되니까. 자기 잘못 하나 없어도 멀쩡한 인생 순식간에 좆될 수 있다는 걸, 난 내가 겪어보고 나서야 알았다.

멀쩡하던 놈이 그렇게 제대로 망하기도 쉽지가 않다보니 사람들이 내 말을 안믿어줬다. 그냥 약간 억울한 일이 있었는데 내가 과장을 하려니 했다. 실제로는 그나마 믿어줄만한 것들만 풀어놓는대도 말이다.

그러다보니 입을 닫고 살게 됐다. 그리고 누가 딴엔 억울하네 파란만장했네 하는 이야기 하는게 지겹게 느껴졌다. 영화 "Land of the Dead"를 보면 이런 대사가 있다.

I don't want to hear your fucking story. Everyone's got a story, and I am sick of hearing them.
What's your story, Riley?
I don't have one.

내가 딱 저랬다.

그렇게 그렇게 해서 미국까지 흘러왔다. 늦은 나이에 학교를 갔다보니 학생들이 다 나보다 한참 어렸다. 그래서 여기서 친구를 굳이 만든다는 생각도 없었다. 뭐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같이 수업 듣고 도서관에서 자주 보고 그러다 밥도 같이 먹고 그렇게 친구가 몇명 생기게 되더라.

그 중에 한명은 내가 정말 황당한 경험을 제법 했다는 데 대해서 굉장히 흥미를 가지더라. 하기사 그럴법도 하겠지. 신기한 이야기였겠지만 내가 뻥치는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았을 것이고 이야기도 앞뒤가 맞아 나가니까. 근데 어느 순간 이 녀석이 날 이해하는 듯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냥 서로 앞으로 일에 대해서 얘길 하다가 그랬다. 내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지 않고, 언젠가 다시 찾을 것들에 대해서 생각할 땐 행복하지 못했지만, 이젠 그것들을 포기했다. 그러고 나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더라. 어쩌다 이런 이야기까지 했다.

그애가 말했다. 어떤 사람에게 일어나는 다양한 일, 경험, 충격 따위가 모두 그 사람을 만든다. 지금 내 성격, 하고 싶은 것, 사물에 대한 태도 등등 모두 과거에 많은 일을 겪으며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러니 과거에 일어난 일을 외부 충격으로 볼 게 아니라 지금 나의 구성품으로 봐는게 맞을 것 같단다.

내가 나이 서른이 되어서 안 걸, 그애는 벌써 알고 있었다. 과거와 화해하고 과거를 받아들이는 법을 말이다.

사실 지금도 울컥할 때가 있다. 지난 일을 돌아보며, 내 지난 날 내가 뒤집어쓴 똥들, 또 왜 그 때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나 등등. 하지만 이젠 그렇다고 갑자기 술을 퍼마시거나 가슴을 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나라는 말을 한다. 과연 무엇에 중요한 것일까? 과거엔 "내 성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젠 이게 내 행복에 중요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한동안 난 안좋은 일을 당한 나를 나 자신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언젠가 고쳐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그 일조차 지금의 나를 만든 중요한 경험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렇게 내 과거를 받아들이고, 그걸 내 일부로 인정할 때, 정말 지난 끔찍한 일들도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별 것 아니지만, 그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알게 된 인생의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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