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imple Life

귀한 분들의 공개적인 개싸움

오늘 출근하다가 옛날 일이 하나 생각나서 끄적여본다. 때는 2012년 겨울이었다. 지금이야 뭐 구글 파이낸스에 뜬 헤드라인 뉴스만 보고 말지만, 그 때는 일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서 금융계의 주요 뉴스는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아주 흥미로운 일이 불거져 나왔으니 바로 Bill Ackman의 헤지펀드가 허벌라이프라는 회사에다가 $1 billion짜리 공매도를 때린 일이다.

이 일의 시작은 허벌라이프가 투자자들과 가진 컨퍼런스콜이었다. 누군가 질문을 하나 던졌다.
“당신들의 네트웍 밖으로 팔리는 상품은 얼마나 됩니까?”
평이해보이는 문장이지만 속 뜻은 그렇지 않다.
‘당신의 회사는 완전한 사기입니까?’
곧 빌 애크먼은 이 회사에다가 대형 공매도를 했음을 공개적으로 떠벌렸고 허벌라이프의 주가는 폭락했다.

허벌라이프는 건강식품을 파는 회사인데, 사업 방식이 다단계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저 질문은 허벌라이프가 진짜 경쟁력 있는 건강식품을 팔아서 수익을 내는 회사인지, 건강식품은 그냥 수단이고, 사람을 모집해다가 빨아먹는 걸로 돈을 버는 것인지 물어본 것이나 다름없다. 저 유명한 헤지펀드 매니저의 말은 그렇다. 이 회사는 건강식품 사업을 하는게 아니라 다단계 사기란다. 실제로 허벌라이프에 빠져서 집 날리고 인생 파탄나는 피해자들도 있다보니 이 말이 맞는 구석이 있다. 덧붙여 그는 이 회사 자체가 완전한 사기극이기 때문에 주식의 가치도 0이란다.

왜 이렇게 공개적으로 떠들어서 그 회사를 흔드냐고 물었다. 대충 이런 식으로 대답하더라.
“이봐요. 난 이미 부자에요. 사실 이 거래에서 돈을 벌지 않아도 상관 없다구요. 저는 이 회사를 진지하게 연구한 끝에 이게 전혀 가치가 없는 사기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럼 내게 어떤 도덕적 의무(moral obligation)가 있겠습니까? 이걸 세상에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공매도는 왜 했냐고 물어보니, 본인은 헤지펀드를 굴리는 사람인데 내가 말만 떠들면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냐. 내가 실제로 내 돈을 걸어야 내가 진지하게 하는 소리라고 믿어주지 않겠냐고 했다. 뭐 다 맞는 말 같다.

여기에 대해 허벌라이프의 경영진은, 당연히,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자신들의 사업 전략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잘못된 건 빌 애크먼의 사업 모델이란다. 남의 회사를 헐뜯고 사업에 타격을 준 다음에 주가가 하락하면 거기서 이득을 취하는게 언뜻 보기에도 나빠 보인다. 사실 난 공매도는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썩 건전하지 못하게 보일 수 있다는 걸 이해한다.

여기서 끝났다면 그저 수많은 공매도 사례 중에 하나로 남았겠지만 장작이 더 쌓인다. 또 다른 유명한 헤지펀드 매니저 Carl Icahn이 등판했다. 그는 빌 애크먼에 정확히 반대 의견을 갖고 있었다. 나도 칼 아이칸의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회사가 어떤 전략으로 접근을 하든지, 주식의 가치는 수익을 내는 능력이니까. 뭐 내 의견 따위야 아무 의미 없지. 두 유명한 헤지펀드 매니저가 한 종목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가지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이걸 드문 사건으로 만들어준 것은 둘이 같이 출연한 어느 TV 프로그램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투자자들 중 두명 아니신가. 나같은 무지렁이는 만나고 싶어도 못만나는 귀하신 분들이다. 그런 분들이 2013년 1월 25일 CNBC에서, 비록 전화상이긴 해도, 어느 상장사의 가치에 대해서 논하게 됐다. 수준 높은 지식과 논리 싸움을 기대한 사람이 많았겠지만 두분은 온몸을 불살라 이 기대를 저버린다. 블룸버그인가에서 본 기사는 꼭 유치원 구석에서 벌어진 꼬마들의 말싸움을 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들이 주고받은 말이라는게 대충 ‘쳐맞고 질질 짜는 꼬마’, ‘패배자’, ‘니같은 놈 패고 다녔는데’… 뭐 유치원까지는 모르겠지만, 중학생 수준은 확실히 못되는 것 같다. 이걸 다름 아닌 전세계적인 거물들이 공중파에서 씩씩대며 쏟아냈으니.

칼 아이칸은, 주가가 낮아진 이 기회에, 누군가 주식을 대량 매집하면 공매도 때린 빌 애크먼은 엿먹는거라고 했다. 빌 애크먼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 있으면 니가 직접 하라며 칼 아이칸을 도발했다. 그래 칼 아이칸도 헤지펀드 매니저 아닌가. 말만 하면 뭐하겠는가. 저 도발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돈을 벌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칼 아이칸의 펀드는 허벌라이프를 대량 매집해서 최대 주주에 등극했다.

두 억만장자가 한 종목에 한명은 long, 다른 한명은 short을 걸어놓고, 공중파에서의 말싸움에 이어, 자존심 대결을 벌이는 드문 광경이 펼쳐졌다. 이 두명이 다 옳을 수는 없다. 판돈도 billion 단위다. 한명이 크게 벌면, 다른 한명은 크게 잃는다. 이게 진지한 비즈니스라는 건 나도 이해를 하는데 말이야. 자꾸 국민학교 시절 자존심을 걸고 짤짤이를 하던 동네 꼬마들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참 남자란 동물은…

조지 포먼과 무하마드 알리의 대결이 20세기에 있었던 세기의 대결이라면, 이건 21세기의 대결이 아닐까. 적어도 금융/투자 사업에 발 담그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나 말고도, 동의하는 사람 좀 있을거다. 이 스펙터클한 대결이 작년에 대충 마무리가 되었다. 빌 애크먼이 본인의 공매도 포지션을 정리했다. 대충 $1 billion 가까이 손실을 본 것 같다. 칼 아이칸은, 비록 허벌라이프 주식을 다 처분한 것 같지는 않지만, $1 billion 정도 벌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난 싸움을 즐기지. 특히 내가 이길 때는 더.”
캬 21세기 상남자란 이런 것일까. 빌 애크먼은 쿨하게 축하를 해줬단다. 지금은 둘 사이도 좋다니 로맨티스트가 따로 없구나. 돈이 너무 많아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