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

It’s just business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이 일치하는가? 그러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안타까운 점은, 이 이유로 회사에서 나의 능력과 기여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건 기분 좀 나쁘고 마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연봉이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생각보다 초봉이 높지 않기 때문에 학교를 갓 졸업하고 커리어를 시작한 사람들에게 더 문제가 된다. 그럼 이 곤란에 처한 미국인은 어떻게 하느냐?

이 동네 사람들의 사전에 ‘아등바등 버텨본다’ 따위는 없다. 그냥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고, 실현시킬 수 있는 곳으로 떠나면 그만이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겠지. 하지만 억울함을 쏟아내거나 앙심을 품는다거나 이런 건 못 봤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 거지 여기 개인적인 감정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단 거다. 심지어 해고를 당해도 그러더라. 본인과 직장 사이에 미스매치가 좀 있었고, 그 이유로 본인도 관둘 생각이었는데 회사에서 먼저 나가라고 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봤다. 이게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말이야. 그 친구가 좀 예외 케이스인가? 나는 이렇게 쿨 하게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이 사람들이 쿨 한 건 회사를 들어오고 나갈 때만은 아니다. 평소에도 그렇다. 특히 회의할 때 그런 점이 두드러진다. 발제자가 가져온 아이디어에 약간의 이슈라도 있다면 이들은 지적하는 걸 망설이지 않는다. 한국 직장 기준으로는 매우 직설적이다. 인신공격이나 일부러 상대를 자극하기 위한 언동은 허용되지 않으나 문제 해결로 가는 과정이기만 하면 많은 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이것도 지역과 회사마다 차이가 조금씩 있는지, 내가 일하는 시카고 지역은 그래도 사람들이 점잖은 편이란다. 친구가 일하는 보스턴의 어느 회사에서는 육두문자까지 심심찮게 나와서 적응하느라 애먹었다고 한다. 그렇게 치고 받다가도 회의만 끝나면 다 잊어버리고 그날의 결론만 갖고 나간다. 정말 쿨 하지 않은가?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동네 사람들의 DNA에는 쿨 함이 아로새겨져 있는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 여기도 질척질척한 사람들 많다. 공과 사가 명확해서일까? 좀 그래 보이긴 하지만, 이건 결과이지 원인은 아닌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설명을 해보자면, 이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과 본인의 정체성을 따로 떼 놓고 보는 것 같다. 흔히 이렇게 말하지. It’s just business. 이건 내 일이지 내가 아니라는 말이다. 잘 이해가 안되신다고? 사실은 나도 그렇다.

내가 직업으로 하는 일을 나의 정체성에서 완전히 떼어 내놓을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못한다. 내가 만든 최선의 결과물이 제대로 인정을 못 받으면, 난 상처를 받는다. 술 한잔 하고 털어버리건, 그걸 더 분발하는 계기로 삼건, 그건 그 다음일이다. 당장은 마음에 상처를 입고 끙끙 앓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똥누다 생각났을 직한 걸 아이디어랍시고 들고 와서 내 시간을 낭비하고 있더라도 난 나서지 않는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 악당을 물리쳐 주기를 바랬다. 그 짐을 떠맡는 사람이 내가 되면, 인내심이 허용하는 한, 에둘러 표현을 했다. 그러다가 부작용이 생기는 것도 많이 봤다. 일이 서툰 신입사원에게 “잘하고 있지만…” 이렇게 이야기했더니, 본인이 진짜 잘하고 있는 줄 알고 하던 그대로 계속 저지른다던가. 허나 직설적으로 얘기를 했다간 상대방이 본인을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 피하고 싶은 비용이다. 그래서 상대방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지적하는 게 한국에서는 중요한 사회적 기술이었다.

상대의 기분을 언짢게 만들지 않으면서 듣기 싫을 이야기를 오해없이 전달하는 기술은 정말 부러운 능력이다. 여기서도 가치 있는 덕목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그만큼 희귀하다는 게 문제다. 우리가 다 카운슬러나 네고시에이터는 아니지 않은가. 기껏해야 엔지니어들일 뿐인데, 미분방정식을 풀었으면 풀었지 저런 능력을 기대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러니 차라리 직설적으로 말해서 의사소통의 효율을 높이는 걸 선택하지 않았나 싶다.

정당한 문제제기에 기분 나빠 하는 사람은 여기에도 물론 있다. 그래도 문제제기를 한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이건 받아들이는 사람이 미성숙한 탓으로 본다. 한국에서라면 직설적인 말로 상처를 준 사람을 비난할 법한데도 말이다. 무엇이 더 낫다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다. 이건 어떤 편익을 얻고 어떤 비용을 치룰지에 대한 선택이다. 한국에서라면 다소 오해가 생기는 걸 감수하고라도 상대방의 기분을 다치지 않는 선택이 흔해 보이는데 여기서는 그 반대라는 거지. 같은 상황에 다른 선택을 하는 서구 문화권의 배경에는 일과 본인의 정체성을 떼어놓고 보는 특유의 태도가 있어 보인 다는게 내 생각이고. 설명이 자꾸 길어지는 걸 보니, 나도 100% 이해하진 못한 게 확실하다.

미국 영화 최고의 걸작 중 하나인 ‘대부’를 보고 있었다. 영화 막바지에 주인공의 심복이 배반하려다 실패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나온 대사 하나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마이클에게 이건 비즈니스일 뿐이라고 말해주게. 난 그를 항상 좋아했어.”

아니 좋아하면서 왜 죽여? 마이클을 죽이려 했던 건 내 비즈니스이지 내가 아니란 말인가? 이게 일에 관한 거라면 마이클의 비즈니스를 죽여야지 왜 마이클을 죽여? 거기에 상대방은 이렇게 대꾸한다.

“그도 이해할 겁니다.”

뭐를 이해한다는 건지 난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참 군더더기 없는 영화인데, 내가 business라는 단어의 미묘함을 잘 모른 탓에 찜찜함이 남았다.

또 다른 영화 ‘테이큰’의 막바지 장면이다. 악당이 목숨을 구걸하며 이렇게 말한다.

“제발 이해해주게. 너에게 악감정이 있어서 한 건 아니야. 그저 비즈니스일 뿐이지.”

주인공은 이렇게 받아 친다.

“난 순전히 악감정으로 하는 거야.”

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시원하게 쏴 죽인다. 캬! 속이 다 후련하다. ‘대부’가 더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이 장면들에서 만큼은 난 ‘테이큰’이 마음에 든다.

————————————————————-
본문은 ‘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에 실린 글입니다.

반응형

'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래도’가 아니라 ‘그래서’  (0) 2021.02.11
압박 면접  (0) 2021.02.10
야구만 잘하면 얼룩말이라도 상관없어  (0) 2021.02.06
경쟁  (4) 2021.02.05
2011년 6월 1일  (0) 2021.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