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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

야구만 잘하면 얼룩말이라도 상관없어

미국의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재키 로빈슨’이라는 선수가 있다. 그는 최초의 흑인 선수로서 여러 반발에 시달렸는데, 그 중에는 선수단의 보이콧도 있었다. 그러자 감독인 ‘리오 듀로셔’는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나는 그 녀석 피부가 노랑이건 검정이건, 줄무늬건 상관없어. 야구만 잘하면 그만이야.”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 감독이 미국의 헌법 정신이나 천부인권 같은 것들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그런 건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진심으로 경기에서 이기게만 해준다면, 그래서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얼룩말이라도 야구장에 내보낼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이 일화로부터 미국 사람들의 마인드셋을 엿볼 수 있다. 여기 사람들은 정말 실용적이다. 내 배경이 무엇인지 신경 쓰지 않는다. 피부색이 노란 것도 상관없다. 영어 발음이 어색하더라도 괜찮다. 문제만 풀 수 있다면 그 어떤 다른 것도 부차적인 이슈일 뿐이다. 시카고 다운타운에서 일하는 나나, 캘리포니아 마운틴 뷰의 구글 오피스에서 일하는 인도인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워싱턴 DC에 자리한 세계은행에 고용되어 있는 중국인 경제학자 모두 마찬가지다. 위치와 업종, 국적 불문하고 일만 잘 할 수 있다면 외국인을 기꺼이 고용하는 게 미국 회사들이다.

뒤집어 말하면, 내가 여기 미국 회사에 고용되어 있는 이유는 일을 해낼 거라는 기대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을 잘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물론 한국의 직장에서도 일을 못하는 것보다는 잘하는 게 낫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동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라는 신분까지 고려하면 그 차이가 한국에서는 겪어볼 일이 없을 정도로 크다. 많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난 그 중에서 특히 두 가지가 두드러지는 것 같다.

먼저 경제적인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는 일 잘한다고 소문나봐야 야근이나 실컷 하지 돈은 얼마 더 안 준다는 푸념을 많이 들었다. 물론 반쯤 농담이 섞인 말이지만, 거꾸로 보면 이게 반 정도는 사실이기도 하다. 같은 직급이라면 비슷한 연봉을 받았고, 직급이 높으면 어지간해서는 아래 직급보다 낮은 보수를 받는 일이 없었다. 쉽게 이야기하면, 내가 일을 두 배로 한다고 연봉이 두 배가 되진 않는다. 그런데 여기는 다르다. 정말 일을 한만큼 대우를 받는다. 같은 오피스에 앉아 있어도 연봉 차이가 많이 날 수 있다. 따라서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게 매우 중요하다.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쪼들린다고 생각하면, 미국 생활이 즐겁기는 어려울 테니까.

다음 이유로는 인간관계다. 새로운 도시, 나라까지 바뀌었으니 동네 친구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학교에서 친하던 애들이 다 비슷한 동네에서 직장을 잡으면 좋겠지만, 미국이 워낙 넓어 놔서 쉽지 않다. 자연스레 인간관계도 직장을 중심으로 맺어진다. 회사에서 짐짝 취급을 받는 사람이 좋은 평판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다. 언어에 한계도 있기 때문에, 직장에서 평판을 잘 쌓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녹아 들어갈 기회가 많아진다.

다시 강조하자면, 미국의 회사들은 내가 일만 잘 하면 얼마든지 좋은 대우를 해줄 용의가 있다. 여기서 그 기대를 충족시켜주면 많은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된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 미국 사람들의 정 없음을 탓하는 사람도 본 적이 있다. 이게 동정심에 호소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고, 이 동네 사람들은 이게 문제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일 잘 해서 직장에서 인정받는 게 미국에 적응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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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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