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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

‘그래도’가 아니라 ‘그래서’

한국에서 회사를 다닐 때 겪은 일이다. 한 달은 걸릴 일인데 며칠 만에 끝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난 그 지시를 전달하는 사람에게 그 결정이 잘못된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그 사람은, 실망스러운, 그러나 충분히 예상했던 대답을 들려줬다.

“그래도 해라.”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사실 이런 지시가 하달되는 일은 왕왕 있어왔다. 그 때마다 난 최선을 다해서, 되든 안되든, 뭐든 했고 말이지. 그런데 그날 있었던 일이 유독 기억에 남은 이유는 이 사건으로 내 임계치를 넘겨버렸기 때문인 것 같다. 그때도, 있던 힘까지 다 빠져버릴 만큼 실망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뭔가를 하긴 했다. 허나 이해도 안되는 일, 아닌 줄 뻔히 아는 그 길을 억지로 가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였고 자주 겪는다고 덜해지지도 않았다. 그 후로부터 난 ‘그래도’라는 단어를 병적으로 싫어하게 됐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당연하게도, 내가 싫어하건 말건 그런 지시는 계속 떨어졌다. 내 입장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여기 미국에서는 ‘그래도’라는 말을 좀처럼 들을 수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그래서’. 고작 음절 하나 다를 뿐인데, 그 차이는 단순하지 않다. 충분히 짐작되겠지만, 미국의 직장에서는 설득과 협의가 아주 중요하다. 심지어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일이 왜 필요하고 우선순위는 어떻게 되며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 꼭 설명을 하고 협의를 한 후에 뭐라도 진행을 한다.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에서도 이런데 그 외의 관계라면 어떻겠나? ‘까라면 까’는 전혀 통하지 않는 대신 상대방을 납득시키면 협조를 수월하게 얻어낼 수 있다. 한국에서도 이런 과정이 있긴 있다. 허나 나조차도 이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방적인 지시도 많았던 게 사실이고.

뭐든 설명과 설득이 선행되어야 하는 동네에 살다 보니 내 부족한 영어가 원망스러울 때가 많다. 상대방을 이해시킨다는 게 그렇다. 이렇게 해서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으면 또 다르게 설명을 해야 한다. 이게 물론 영어만 잘 한다고 되진 않는다. 지금 다루는 주제와 연관된 부분까지 깊게 이해를 하고 그걸 조리 있게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 먼저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이것도 부족한 것 같다. 토론과 거리가 먼 환경에서 평생을 살아왔는데 이게 갑자기 잘 된다면 오히려 이상한 거다. 거기다 영어까지 자유롭지 못하니 뭐… 아마 이런 어려움을 겪는 한국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이게 고위직에 한국 사람이 드문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지금 일하는 회사에는 곳곳에 화이트 보드가 있어서 그림을 적극 활용하는 걸로 내 약점을 커버하고 있다.

‘그래도’ 대신 ‘그래서’가 쓰인다는 데서 알 수 있겠지만, 미국의 직장 문화 자체가 한국보다는 많이 합리적이다. 아마도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직원들을 지킬 수 없다. 미국엔 좋은 회사도 많고, 이직에 대한 거부감도 없다. 여기 사람들은 현재 직장에 만족하지 못하면 거침없이 회사를 옮긴다. 만약 상사가 무리한 지시를 계속 내린다면, 꾹 참고 따르는 건 한두 번일 뿐이다. 실제로 지인이 다니는 회사에서 팀장이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팀을 몰아가자, 팀원들이 시차를 두고 모두 퇴사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따라서 직원들이 합리적이라고 느낄 만한 문화를 갖추지 못하면, 일 할 사람이 떠나버린다. 이 사실이 회사에게 큰 압력인 것 같다.

직장 문화가 합리적이라는 점은 일하는 입장에서 장점이 많다. 무엇보다 작은 일이라도 내 의견이 충분히 반영된다는 점이 만족스럽다. 무리한 지시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자주 생기지 않는다. 대신 조직 문화가 좀 느슨하다. 한국에서 일할 때는 직장이 단순히 일하는 곳 이상이었던 것 같다. 거기서 함께 하는 동료들과 끈끈한 전우애 같은 것을 느낀 적도 많았다. 그런데 여기서 직장은 단순히 돈을 벌고 커리어를 이어 나가는 수단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을 보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죽이 잘 맞지 않는 이상 동료들과도 그냥 사무적인 관계로 남을 뿐이다. 뭐… 여기 대해 큰 불만은 없지만, 아쉬울 때가 가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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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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