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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

마치며

2019년 5월 어느 날,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가 뜬금없이 책을 써보자고 했다. 나는 당황하긴 했지만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이 녀석은 원래 호기심이 왕성했으니까. 학창 시절에는, 학업 성적은 탁월했으나, 격투 게임과 만화책에 푹 빠져 살더니 대학교 가서도, 맥락을 가늠할 수 없는, 여기저기에 발을 담그고 다니더라. 대학교 수준에선 그게 통하지 않는지 그러다가 학사경고도 수집하긴 했다. 졸업 후 대학원으로 직행했는데 꼭 공부 안 하던 애가 나중에 가방 끈 길어져 있는 건 왕왕 보는 거라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이런 친구가 진득하게 회사만 다니고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나? 분명히 퇴근하고 뭔가 안 어울리는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고, 그게 이 친구에게 어울리는 거다. 의외인 점이라면 하필 나를 끌어들이려 한 것인데, 알고 보니 여기에 OK를 한 사람이 나 밖에 없었다. 결국 이 친구의 제안은, 그 친구 입장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 게다.

나도 이 인기 없는 프로젝트에 뛰어든 게, 뭐 그럴싸한 이유가 있긴 하다. 먼저 지난 10여 년간의 미국 생활을 되돌아보고 싶었다. 마침 시민권 신청을 도와줄 변호사를 정하자 마자 연락이 왔다. 그 때가 딱 10년이었으니 적당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내 이야기가 도움이 될 사람이 어딘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지인들이 많은 이야기를 해줬고 크게 도움이 되었다. 나도 내 글로써 같은 도움을 주고자 했다. 지금까지 받아왔던 질문들을 떠올려 가며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지금 내 글들이 수년 전에 해줬던 얘기보다는 더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워드 파일을 열고, 글이 하나 둘 쌓여갈수록 사실 하나가 분명해졌다. 나는 정말 이민을 온 것이다. 산 속에 들어가면 전체 모습을 보기 어려운 것처럼 난 이 사실을 체감하지 못하며 살고 있었다. 몇 해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내국인 대신 외국인 입국심사를 받으며 어쩌면 영영 내국인용 게이트를 사용할 수 없겠구나 하고 생각한 적은 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랫동안 지난 미국에서의 시간과 그것이 이민이라는 결과를 낳았음을 주지하며 살기는 또 처음이다.

나는 이민을 목적으로 미국에 오지는 않았다. 부산을 떠나 서울로 갈 때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엔지니어가 되기로 결심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 공학을 더 잘 배울 거라고 믿을 이유가 있었다. 내가 서울 시민이 되어 살겠노라고 마음먹고 서울행 기차를 탔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미국에 온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에 가면 공부를 더 잘 배우고 엔지니어로서의 역량도 더 잘 발휘할 수 있을 거라 믿을 이유가 있었고 그래서 여기 왔을 뿐이다. 이민은 부수적인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엔 너무 거창해 보이는게 사실이지만.

거창한 어감과는 다르게, 이민이 별 것 아니라는 말을 꼭 하고 싶다. 여기 와보니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는 사람들이 참 많더라. 게다가 요즘은 물리적인 거리로 인한 단절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한국에 있었던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침대에 기대 앉아 랩탑을 들고는 GTalk으로 미국에 있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요즘은 손바닥 안에서 이게 다 가능하지 않은가? 게다가 Pandora에서 아이유 노래가 나오고, Netflix에서 한국 드라마가 나오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어쩌면 20여 년 전 부산과 서울의 거리보다 지금 서울과 미국 시카고의 거리가 더 가깝다고 할 수도 있겠다.

또 하나, 서로 글을 주고받으며 이 별난 친구에 대해서도 조금은 더 알게 되었다. 게임 실력, 주량, 가족 등등 이 친구에 대해서는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뭘로 밥을 먹고 사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게다. 다니는 회사 이름이나 공장의 위치, 또 주재원으로 뺑뺑이 도는 것은 알았다. 그런데 거기서 IT를 맡고 있을 줄이야. 너 석사 때 공부한 거 만든다고 그 회사 간 거 아니었냐? 전공 서적 밀어 놓고 랜 선을 만지작거리며 느끼는 고민이 당연히 있을 것인데, 내가 너무 친구들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살아온 것 같아 반성 좀 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도와준 분들께 고맙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내가 오늘에 이른 과정을 되돌아보니 내게 도움을 준 참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아직 대단한 걸 이루지는 못했지만, 감사를 표하는데 설익은 시기 같은 게 어디 있겠나? 그분들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제공해주고, 이 책을 실현시키기 위해 모든 일을 다 해준 잔마왕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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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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