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얀 드봉 감독의 트위스터를 아주 재밌게 봤다. 지금은 뭐 명작 반열에 올라가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영화인데 이 속편이 작년에 나왔더라고. 언젠간 봐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는데, 작년이나 지금이나 극장을 다닐 형편은 못 되고, 이왕 빌려 보는 김에 원작까지 빌려서 두 편을 내리봤다.
1편은 명실상부한 최고의 재난 블록버스터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 배우인 헬렌 헌트를 좋아하기도 해서 다시 봐도 재밌었다. 지루할 틈도 없이 매 1분 1분을 즐긴 드문 영화다. 그럼 2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가 레스토랑 비즈니스에 대해서 좀 알게 된 게 있다.
우리가 훌륭한 셰프의 음식을 먹고 싶으면 고급 레스토랑에 간다. 헌데 그런 고급 레스토랑의 음식은 사실 셰프의 음식이라고 하기가 좀 어렵더라고. 레스토랑이 이미 메뉴와 레시피를 짜놓고 있으면 셰프는 그대로 실행만 한단다. 셰프의 개성이 음식에 들어가고 어쩌고 하는 건 오너 셰프가 하는 곳이나 가능한 곳인데, 동네 골목 식당이라면 모를까 어지간한 고급 레스토랑은 투자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셰프가 재주를 부릴 여지가 별로 없단다. 대단한 스타 셰프가 자기 이름 걸고 하는 데라면 모를까.
물론 같은 레시피라도 셰프의 기량에 따라서 결과물은 천차만별이지. 아무리 고든 램지의 레시피라도 실행하는 게 나면 그냥 뭐 어설픈 음식이 나오기 마련이니까. 재료도 고르고, 재료의 특성에 따라 정확히 조리하고 뭐 이런 기술은 보통으로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급 레스토랑에서 기량을 펼치는 셰프들을, 단지 그들의 레시피가 아니라는 이유로, 폄하할 수는 없다.
영화도 비슷하다고 들었다. 어떤 영화를 만들지는 요리의 레시피 수준으로 이미 다 짜여져 있다. 감독이 하는 일은, 레시피를 실행하는 요리사처럼, 이미 구상되어 있는 영화를 화면에 옮기는 것 뿐이다. 작가주의 감독이나 대단한 거장이 아닌 이상 다 이런 식으로 굴러간다. 사실 이렇게 보면 영화가 감독의 영화가 아니라 제작자의 영화인 것이지. 음식이 셰프의 음식이 아니라 레스토랑의 음식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현장을 지휘하고 화면에 결과물을 담아내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 나 같은 놈한테 맡기면 좆된다. 감독의 기량 또한 영화의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2편의 감독이 정이삭 감독이더라고. 내가 전에 봤던 미나리의 그 감독이다. 이 바닥에서는 신인이나 다름 없는 처지라 딱 레시피를 수행하는 요리사 정도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럼 그 요리사로써의 기량은 어떠했느냐 하면, 대단히 높은 기량을 갖고 있는 것 같다. 2편은 대단히 충실하게 구현된 블록버스터이다. 어디 하나 어설픈 구석이 없다.
속편이다보니 1편의 공식을 똑 같이 따라간다. 오프닝엔 초대형 토네이도. 거기서 주인공과 가까운 사람이 좀 죽는다. 주인공은 그걸 계기로 토네이도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는 좀 작은 토네이도, 좀 더 큰 토네이도, 피날레는 역시 초대형 토네이도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는 점이 특히 좋았다. 악인은 하나도 없고, 밉상도 하나도 없다. 다들 생각은 조금씩 다르고 거기에 따른 갈등도 약간은 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버무린 건 아무래도 감독의 실력이지 싶다. 로맨스도 약간은 있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있으면 주변 남자들이 조금씩은 연심을 품는 게 당연하니까.
여주인공의 외모가 뛰어난 것도 좋은 점이다. 선해 보이는 눈이 특히 아름답다. 여주인공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신이 많은데 재료의 특성을 잘 알고 장점을 살리는 건 훌륭한 요리사의 덕목이지. 남자 주인공은 탑 건에 나온 글렌 파월인데, 비중 있는 조연 정도의 인물이었지만, 눈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이들 둘 다, 블록 버스터라도 신인 감독의 작품에 나온 걸 보면, 아직 대단한 스타는 아닌 모양인데 앞으로 그렇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또 반가운 얼굴이 나온다. 앤서니 라모스. 나는 얘가 남자 주인공이고 글렌 파월이 비중 있는 조연인 줄 알았는데, 극이 진행되면서 예상과는 다르게 바뀌더라고. 연기 잘 하고, 인 더 하이츠에서 노래와 춤 실력까지 보여준 배우다.
아무튼 재밌게 봤다. 전체적으로는 1편이 좀 더 나은 영화인 것 같은데, 2편을 더 쳐주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충실한 블록 버스터 한 편 때리겠다고 마음 먹으면 확실하게 역할을 해준다. 아쉬운 점이라면 관객들과 눈 높이가 같은 인물이 조금 더 강조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근데 단점 조차도 자연스러운 게, 1편에서는 그 인물이 남자 주인공의 약혼녀이고, 2편에서는 그냥 견학 온 기자 아저씨니까 다른 사람 제쳐놓고 그 아저씨 관점에서 뭐가 진행되는 건 말이 안 되지.
여담으로 주인공이 민들레 씨앗을 날려서 바람을 파악하는 장면이 있는데 보자마자 눈살이 찌뿌려졌다. 아무래도 서버브 살면서 민들레 제초 작업을 일 년에 몇 번씩 하는 처지이다보니 어쩔 수가 없네.
'Simple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약간은 당황스런 후속작 (0) | 2025.05.17 |
---|---|
학교 프로그램 이름으로 본 미국인들의 친절함(?) (0) | 2025.05.17 |
권력 지향의 개체들 (1) | 2025.05.02 |
인생의 반은 우연인 것 같다 (0) | 2025.05.02 |
트럼프 시대의 리쇼어링 (1) | 2025.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