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에는 나이아가라 폭포로 휴가를 다녀왔다. 자동차로 꽤 긴 시간 이동을 해야 했지만, ‘K-Pop Demon Hunters’ 덕분에 편하게 다녔다. 애들이 이걸 어찌나 좋아하는지 보고 또 보고 하는데도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특히 여기 나온 노래의 파급력이 대단한데, 지금 Billboard Hot 100의 2위에 여기 노래가 올라 있다. 그리고 50위 안에 다른 노래 서너개가 더 있다. 미국에서 제일 인기 있는 노래가 애니메이션 사운드 트랙이고, 비록 한국어는 아니지만, 한국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콘텐츠인 것이다. 여기에 깨알 같이 로제의 아파트가 30위권에 있더라. 이만해도 이례적인 일인데, 내가 보기에 더 특이한 점이 이 노래들이 누구 가수 이름으로 올라간 게 아니라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로 올라가 있더라고.
요약하자면 이렇다. 한국계 미국인들을 포함해서 한인들이 모여서 만든 넷플릭스 애니메이션이 공전의 히트를 쳤다. 거기 나온 노래들이 현재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노래들이 됐다. 그리고 그 노래를 부른 아티스트의 이름으로 올라 있는 건 실제로 부른 사람이 아니라 그 애니메이션에 나온 등장 가상 인물들이다.
여러 모로 특별한 사건이다. 그래서 이 사건을 조망한 Wall Street Journal의 기사 제목은 이렇네.
The Biggest K-Pop Band to Top the Charts Isn’t Even Real
애니메이션 사운드 트랙이 빌보드 차트의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는 일은 전에도 있었다. 이미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그러한 일들을 해냈지. 그러나 아티스트의 이름은 언제까지나 실제로 노래를 부른 가수였다. 그런데 이 번엔 그게 아니라는 거지. 사실 내가 여러 음악을 즐겨 들었지만, 실제로 눈으로 본 가수는 몇 명 안 된다. 어차피 보지도 않을 사람, 실제이든지 가상이든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러니 가상의 인물이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일이 실제로 생겨도 나 같은 사람이 즐기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거다. 이 사건은 이 흐름의 어떤 시발점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가상의 밴드는 노래를 스스로 부르지는 않았다. 뒤에서 실제로 노래를 부른 인물들이 있지. 허나 그게 중요하지는 않다. 목소리는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게 누구의 작품으로 인식되느냐인데, 진짜 사람이 아니라 가상의 인물의 작품으로 내걸렸다는 것과,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이질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지. 이러면 대중음악 역시 가상의 인물들, 더 나아가서는 AI를 필연적으로 받아들일 것 같다. 충격적인 일이다.
이 애니메이션이 인기가 있다는 게 미국 주류 시장에서 한국의 위상에 좀 영향을 줬으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그건 쉽게 되지 않을 것 같다. 20년 전에 내가 들었던 소리가 미국은 인종 별로 보는 TV 채널도 다르다고 했다. 그러니까 같은 나라에 살아도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사는 것이나 다름 없었지. 그런데 지금은 더 파편화가 되었다. 이제는 다른 TV 채널이 아니라 다른 콘텐츠를 소비한다. WSJ에서 기사도 나고 빌보드 차트에서 선전해도 전혀 관심도 없는 사람도 존재한다는 게 슬픈 사실이다.
K-Pop이 미국에서 인기를 끌어도 주류인 백인들에게는 어필을 못 하고 아시안과 히스패닉만 열광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어느 정도 사실이다. 아시안 콘텐츠가 인기를 끌면 먼저 아시안과 히스패닉 사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나중에 주류 백인들에게 슬쩍 퍼지는 정도이지 주류 백인들이 먼저 좋아하고 아시안, 히스패닉으로 퍼지는 게 아니다. 그러니 K-Pop Demon Hunters가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미국 서버브의 백인들, 그리고 그들의 초등학생 자녀들은 모른다. 강조하자면 봤는데 재미가 없어 한다는 뜻이 아니다. 아예 모르는 사람도 많고 알아도 손이 잘 안 가는 거지. 다가오는 할로윈에 우리 딸이 Rumi 코스튬을 입고 가도 알아보는 사람이 몇 안 될 거다. 그렇다고 평가절하될 필요는 없고, 또 이런 아시안, 히스패닉 친구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백인들에게도 스며들어가기 때문에 영향력이 아예 없지는 않다. 그냥 빌보드 순위, 넷플릭스 순위를 보고 그 정도의 인기가 백인들 사이에서도 있는 건 아닐 뿐이다.
로제의 APT는 K-Pop인데도 불구하고 미국의 주류 백인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얻었는데, 이건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솔직히 브루노 마스 때문이다. 미국 백인들이 이미 받아들인 브루노 마스가 이 노래에 참여했고 이 노래도 잘 빠졌고 하니까 미국 서버브 백인 초등학생들도 좋아하게 된 것이지. K-Pop Demon Hunters에도 요새 인기 있는 Sabrina Carpenter가 참여했더라면 얘기는 달라졌을 거다. 근데 그런 일이 일어나기에는 음악 스타일이 많이 다르고, 실제 일어났더라면 K-Pop이라고 할 수 없었겠지.
참 아쉽다. 이 인기 있는 콘텐츠로 말미암아 우리 아이가 동네 친구들에게 좀 받아들여질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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