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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 Life

일단 여유가 있고 봐야되

한주 쯤 전인가. 어딜 좀 갈 일이 생겼다. 버스를 타면 정류장도 더 가깝긴 한데 좀 뜸하게 와서 트레인 역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다. 학기가 끝난 터라 U-Pass 날짜도 오버돼서 Transit Card에 현금 충전해서 써야 하는데, 충전기가 트레인 역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버스를 이용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

그런데 갑자기 내가 탈 수 있는 버스가 눈앞에 나타났다. 순간, 내가 CFA에 너무 정신이 팔려 있어서 판단력이 흐려진건지, Transit Card에 credit이 충전되어 있을 거란 생각이 들고, 없어도 현금 내고 타면 되지 뭐 이런 생각에 버스를 타버렸다. 그런데 credit은 없었고 그래서 현금을 내야하는데, 실수로 20불을 내버렸다. 기계는 현금을 먹고, 거스름돈은 없으니 버스 한번에 한국 돈으로 이만원이 넘는 돈을 낸 거다. 버스기사도 황당해하고 나도 어이없어하는데.. 기사는 나보고 일단 좀 앉아있으라고 그랬다.

난 자리에 앉아서 뭘 아껴서 20불을 만회해볼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 그런데 버스기사가 날 다시 좀 부르는 거다. 무슨 문서를 주면서 채우라고 했는데, 실수로 돈을 많이 넣은 데 대한 보고 같은 거였다. 난 큰 기대 없이 주소 연락처를 적고 내리려는데, 기사가 영수증 같은 것을 끊어주며 적혀진 번호로 전화해서 해결을 보라 그랬다.

CFA 때문에 정신도 없고 해서 시험이 끝나면 전화를 해보려 했지. 그런데 며칠 전에 CTA에서 우편물이 하나 왔다. 뜯어보니 18불이 들어 있는 Transit Card가 왔네. 내가 실수로 낸 금액을 CTA에서 챙겨서 보상해준 거다. 이것 보고 참 미국이란 나라가 엉성해보일 때도 많지만 뭘 하나를 해도 제대로 하는구나 싶었다. 자연스레 내가 한국에서 일했던 기억이 났다. 뭘 하나를 해도 제대로 좀 하고픈데, 그럴 기회, 리소스를 전혀 주지 않았지. 대충 돌아가게만 하면 위에선 다 된 줄 알고, 그렇게 해놓고 다른 사람들한테 대충 뒷처리 덤탱이 씌우고 빠져나가면 유능하다는 소리를 듣는 이해가 안되는 구조였다.

당장 버스만 봐도 그렇다. 서울시가 버스를 공영제로 하나 뭔가를 하면서 버스회사의 적자를 보전해주도록 했는데, 버스회사가 허위로 적자보고를 했을 때 적발해내는 방법이 제대로 안갖춰져 있어서

세금이 줄줄 샌다고 그랬다. 일단 뭘 하나 해도 정교하게 설계해서 한번에 제대로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일단 기한 내에 대충 저질러 놓고 나중에 그걸 수습하느라 뺑이를 치는게 참 후진적인 프로시저다 싶었지. 그것마저도 수습이 되면 다행이니... 요새 명박이가 하는 일이 대충 다 그런데 그걸 보면 참 답답하고 이러니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못되는구나 싶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를 해도 제대로 하는 건 여유가 있어서인 것 같다. 만약 버스가 붐볐다면, 버스기사가 나한테 그렇게 신경을 써줬을까 싶다. 길 막히고, 앞에 차가 끼어들지 못하도록 꽉꽉 붙어야 되는 상황이라면 버스기사가 그런 보고서를 만들고 있지 못했겠지. 들어보니 나 같은 케이스가 생기면 그렇게 하도록 메뉴얼이 되어 있어서 길이 막히건, 손님이 큐잉되건 말건 그렇게 한단다. 뭐 이렇게 메뉴얼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어느정도 여유란 게 있으니 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나라는 법이 없어서 법대로 안돌아가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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