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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

영어 공부에 대한 오해

한국에 있을 때 내가 들은 유언비어 중에 이런 게 있다.

“그냥 미국에 살면 저절로 영어가 는다.”

한국에서 미리 영어 공부를 해갈 필요가 없으며, 미국에서도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영어가 해결될 거라는 미신이다. 물론 틀린 말이다. 한국을 떠나 미국의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 영어가 유창해진다면 영어를 못하는 이민 1세대는 없을 것이고, 영어 못해서 직장 못 잡았다는 유학생도 없겠지. 따로 영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영어가 늘지 않기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다.

나이가 어릴수록 언어가 쉽게 습득되는 건 사실이다. 간혹 특별히 영어 공부에 노력을 쏟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지내다 보니 영어가 유창해졌다고 하는 사람을 봤다. 하지만 이것도 너그럽게 봐줘야 20대 아주 초반까지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0대를 넘겼다면, 설사 미국 땅에 있다 하더라도, 따로 영어 공부를 해야만 한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다. 영어든 중국어든 일단 머리에 들어가야 입으로 나올 것 아닌가. 뭐든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아기라면 모를까 이미 성숙한 두뇌는 새 언어를 완강히 거부할 것이다. 그럼에도 새 언어를 이식하려면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미국에 오기 전에 영어 공부를 최대한 해오라고 당부하고 싶다. 미국에 온 사람을 보면, 영어를 원래 잘하던 사람이 더 영어가 잘 는다. 영어가 안되는 사람은 옆에 미국 사람이 있어도 쭈뼛쭈뼛하다가 말도 제대로 못하고 고개만 처박고 있게 된다. 내가 딱 그랬다. 그런데 이미 영어를 어느 정도 하는 사람은 그래도 좀 편하게 미국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영어가 더 빨리 는다. 게다가 영어를 잘하게 되면 주변이 영어를 잘 하는 외국인들로 채워진다. 그렇지 못하다면 같은 처지인 한국인들과만 어울릴 수 있을 뿐이다. 어떤 환경이 유리할지는 뻔하지 않은가. 준비 없이 미국에 와도 열심히 하면 언어 문제를 극복할 수는 있다. 이게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대신 효율에 큰 차이가 있다. 미국 회사에 취직을 하고 싶으면, 빠른 시간 내에 언어를 해결해야 한다. 이미 비효율적이라고 검증이 끝난 길을 구태여 갈 필요도, 여유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 와서도 따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영어가 늘지 않는다. 영어가 는다는 것은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영어 표현의 외연이 넓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새로운 표현을 익히고 실제로 사용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단순히 원어민과 많이 어울리는 것만으로는 이 과정을 충분히 빨리 할 수 없다. 따로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매일 썼던 단어, 문장 또 쓰기만 할 텐데 이러면 신기할 정도로 느는 게 없다. 물론, 같이 밥 먹고 술만 먹어도 얻어 배우는 게 있긴 하다. 하지만 이건 다시 효율의 문제다. 원어민들과 어울릴 수 있느냐의 문제는 차지하고, 영어 공부를 계속 해가면서 사람들과 어울려야 영어 실력을 늘일 수 있다.

두 번째로 흔한 오해는 영어 실력을 단기간에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년 정도 미국에 있으면 굉장히 영어를 잘 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TOEFL이나 GRE 같은 시험 점수라면 한두 달 만에도 올리는게 가능하지만 영어 실력 자체가 그렇게 바뀌기는 굉장히 어렵다. 나 또한 미국에 오기 전에는 1년 정도 영어만 들리는 환경에서 생활하면 실력이 몰라보게 좋아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에 사는 지인들이 들려준 얘기는 내 기대와 거리가 멀었다.

친구 하나는 1년을 미국인이 버스 옆자리에 앉았을 때 불안하지 않게 되는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했다. 이 얘기를 들었을 땐 뭔 겁주는 소린가 했는데, 지내보니 정확한 말이더라. 그 불안하지 않은 것도 영어가 늘었기 때문에 아니라, 내가 영어를 못해도 옆사람이 날 때리지는 않는다는 걸 알아서다. 미국 대도시엔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고, 여기 살면서도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곳 사람들은 영어 못하는 사람을 봐도, 좀 한심하게는 보겠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는 거다. 이걸 이해하고 불안감을 내려놓는데 걸린 시간이 1년이었다.

또다른 지인은 1년 만에 영어가 는다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니 미국에 정착하고 싶으면 튜터를 고용하든지 어쩌든지 최대한 영어 공부를 하라고 말해줬다. 이게 내게 가장 큰 도움이 된 조언이었다. 난 즉시 튜터를 고용했고, 컴퓨터 자판에서 한글을 지웠다. 그의 말 대로 내 영어는 쉽게 늘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잡 인터뷰를 통과할 수 있는 수준이 됐을지 알 수 없다.

마지막으로 조금 덜 흔한 오해는 필요한 언어 능력의 수준이다. 미국을 관광하며 다닌 경험으로 미국 생활에 필요한 영어의 수준을 오해하는 것이다. 유학생들 중에서도 비슷한 착각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이 정도 영어로 의사소통 다 했으니 정착해서 살아도 충분한 줄 안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기본적으로 관광이나 유학은 돈을 쓰러 온 거다. 상대방이 내게서 돈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내 언어가 서툴러도 인내심을 보인다. 이런저런 편의를 봐주는 것은 덤이다. 허나 여기에 정착해서 살게 되면 그러한 관용을 기대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조금만 생각해도 돈을 쓸 때와 돈을 벌 때 요구되는 게 같을 수가 없지 않은가. 말 못하면 상대의 존중을 얻을 수 없는 건 한국이나 여기나 똑같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오해를 요약하자면 수월하게 미국에 정착할 수 있는 수준의 영어를 갖출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것과 아주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20살이 넘은 토종 한국인, 더군다나 나처럼 30이 된 나이에 미국에 온 사람이 필요한 수준에 도달하려면 고생 좀 해야 된다. 뭐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게 쉽게 된다면 영어 유창하게 하는 토종 한국인이 매우 많아야 정상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 잘 알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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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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