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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

Chicago Public Radio

새로운 언어를 익히려면, 그 언어에서 나오는 소리에 익숙해져야 한다. 한국어에서 ‘ㄹ’과 영어에서의 ‘L’ 소리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이렇게 영어에서 나오는 소리는 우리가 한국어를 말할 때 내는 소리와 다르기 때문에 먼저 이 소리에 익숙해져야 그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 또한 말하기를 할래도 귀가 먼저 트여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영어 표현을 내 무기고에 쌓아 놔도 상대방이 하는 얘기를 알아듣지 못하면 대화에 낄 수 없다. 아는 걸 써먹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 많이 들으면 된다.

한국에 있을 땐 TOEFL 듣기 파일을 구해다가 항상 귀에 꽂고 다녔다. 미국에 오고나서 내가 선택한 건 라디오다. 광고 안 나오고 노래 안 나오는 채널을 잡아서 별 일 없으면 틀어 놨다. 심지어는 잘 때도 라디오를 켜 놨다.

처음에는 라디오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는지도 몰랐다. 나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겨우 TOEFL 리스닝이나 하던 사람은 모두 마찬가지일 거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한두 마디씩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듣는 채널이 도대체 뭐하는 건지 어렴풋이 짐작되기 시작했다. 황당하게도 그 채널은 기독교 선교 채널이었다. 나오는 소리라고는 ‘God’, ‘Jesus’ 뭐 다 이런 것들.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것도 모르고 밤낮 듣고 있었다니. 그게 나름대로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있으니까 다른 채널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내가 멈춰선 주파수는 91.5Mhz. 음악도 광고도 없으면서 선교 채널은 확실히 아닌 듯하고, 말만 계속 나오길래 도움되겠지 싶어서 그냥 들었다. 점차 알아듣는 내용이 늘어가면서 정말 좋은 채널을 찾았다는 걸 알았다. 이 방송국의 이름은 Chicago Public Radio. 난 지금도 이 라디오를 애청하고 있다.

미국엔 흔히 NPR이라고 부르는 National Public Radio가 있다. Chicago Public Radio는 NPR에서 시카고 지역을 담당하는 한 갈래다. 비영리로 운영되기 때문에 광고도 없다. 한번씩 도네이션 하라는 소리는 한다. 프로그램도 다양해서 뉴스, 비평, 퀴즈쇼까지 있다. 그리고 대담 같은 것도 많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 목소리 톤도 듣기 훈련하기 딱 좋다. 다양한 발음과 억양에도 익숙해질 수 있다. 게다가 내용도 정말 훌륭하다. 가끔 지나치게 고퀄리티가 아닌가 싶을 때도 있는데, ‘강남 스타일’이 인기를 끌었을 때 그 경제적 의미를 분석하기 위해서 등장시킨 인터뷰이가 무려 ‘김용’ 세계은행 총재였다.

대부분 NPR에서 제작한 것들을 틀어주는데 가끔 BBC에서 만든 것도 나온다. 아마 전 세계 공영 라디오끼리 네트웍이 있는 것 같다. CPR에서 자체 제작한 것도 있다. 이 채널만 듣고 있으면 요즘 중요한 이슈를 모두 알 수 있다.

훌륭한 발음과 문장, 거기다 내용까지. 이것보다 나은 듣기 훈련이 있을까? 유학 시절엔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CPR을 들었다. 이게 있다는 건 내게 축복이었다. 이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내가 여기서 돈을 벌게 되면 꼭 이 방송국에다 기부를 하리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지금 난 매달 정해진 금액을 기부하는 서포터가 되었으니 소싯적에 세운 목표 하나는 이룬 셈이다. 난 아직도 길을 걸을 때, 운동할 때 항상 이 라디오를 듣는다. 영어 듣기가 고민인 유학생들에게 NPR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아이폰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팟캐스트에 National Public Radio 혹은 NPR이라고 검색하면 관련 컨텐츠가 쏟아진다. 나는 그냥 CPR 라디오 앱을 설치해서 듣고 있다. 어떤 프로그램을 들을지 선택할 필요 없이 다양한 컨텐츠를 접할 수 있어서 이게 편하더라.

그러고보니 CPR에 대한 일화가 하나 생각난다. 갓 직장을 잡은 어느 날 퇴근길이었다. 이 라디오에서 어느 젊은 포크 싱어를 소개해주고 있었다. 자기 일상이나 경험을 노래하는 사람이었다. 젊은 사람이 힙합처럼 핫 한 장르가 아니라 올드 한 장르를 한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노래도 아주 재밌단다. 동시에 배경에서 어떤 아시안 푸드를 먹은 경험을 노래한 곡이 흘러나왔다. 아주 그냥 위가 녹아버리는 줄 알았단다. 그런데 잘 들어보니 그 음식은 ‘김치’였다. 이걸 알아듣는 내가 참 대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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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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