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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

2011년 6월 1일

아침에 눈을 뜨고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었다. 평소 같아서는 운동복을 들고 체육관으로 향했겠지만, 이날은 대신 비즈니스 캐주얼을 꺼내서 한참을 바라봤다. 거리는 벌써 다운타운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A Bug’s Life”에 시골에서 온 주인공이 도시에 처음 도착하는 장면이 있다. 촌놈 티 내지 말고 자연스럽게 행동하자고 다짐하며 힘차게 걸음을 내딛는다. 그날 내가 꼭 그랬다. 당시에는 취업 비자도 없고 일은 시작도 안 했다. 잘 봐줘야 곧 외국인 노동자가 될 EAD 카드 소지자 정도이니 길거리에 넘실대는 시민권자, 가끔 있을 영주권자, 더 드물게 있을 H-1B 들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한가? 그래도 어색한 티를 내지 않게 주의하며, 마치 항상 그래왔다는 듯이 그 사람들의 물결에 스며들었다. 다만 머리 속으로는 신경을 쭈뼛 세우고 주변사람들을 신경쓰고 있었다. 그날 따라 태양이 유난히 눈부셨다.

두 블록이나 걸었을까? 긴장이 풀려왔다. 한국에서도 직장생활을 오래 했는데 첫 출근이 유난스러울 필요는 없는 거지. 빈손이 심심해서 스타벅스 커피로 여유를 부려볼까 했는데, 줄이 너무 길어서 포기했다. 앞으로 매일 이렇게 출근할 거라 생각하니 지난 짧은 휴가가 벌써 그리워졌다.

5월 초에 학교를 졸업했고, 지금 출근하는 회사의 잡 오퍼도 비슷한 시기에 받았다. 마침 대학 친구 하나가 시카고에 놀러 와서 우리집에 며칠째 머물고 있었다. 나는, 먹어보고 싶었지만 엄두를 못 냈던, 비싼 와인 한 병을 샀다. 우린 그걸 냉동 삼겹살에 곁들여 먹으며 조촐하게 축하를 했다. 바로 전날만 해도 같은 고기에 훨씬 싼 와인 을 마셨었는데, 하루 만에 이렇게 처지가 달라지는 일이 흔하지는 않을 게다. 앞으로 우리가 축하할 일이 많을 테니 그때는 더 비싼 와인 을 먹자고 약속했는데, 얼마 후 그 친구가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이루어졌다.

출근 전까지 해야 될 서류작업이 좀 있었고, 이미 받아 놓은 다른 잡 오퍼가 몇 개 있어서 rejection letter도 보냈다. 구글 검색을 해가며, 무례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 옷장을 살펴본 그 친구가 내게 비즈니스 캐주얼이 필요하겠다고 해서 시카고 근교의 오로라에 있는 아울렛 매장도 갔다. 거기서 산 옷을 입고 첫 출근을 하고 있는 거다. 그렇게 신경 써준 친구가 고마웠다. 이렇게 알차고 여유로웠던 휴가를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졌다.

이런 공상을 하는 동안 회사 건물에 도착했다. 비로소 이 출근하는 사람들 무리와 내가 다른 점을 알게 되었는데, 나는 회사 출입증이고 뭐고 없었으므로 방문자 패스를 받아야 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유일한 신분증인, 여권을 갖고 나왔지. 내 준비성에 대해 스스로 뿌듯했다. 이렇게 출입구를 통과하고 회사에 가서 나를 소개했고, 곧 큐비클 한구석으로 안내받아 갔다. 첫 출근의 대장정이 마무리가 된 것이다. 때는 오전 8시 30분,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지금도 같은 회사로 매일 출근하고 있다. 사실 한국에서도 첫 출근이라는 걸, 인턴 포함하면, 세번 했었다. 인턴으로 첫 출근을 한 날은, 우여곡절을 좀 겪었던 터라, 기억이 나지만 다른 첫 출근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허나 이날의 출근길만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아마도 내 오랜 바램이 현실화된 순간이어서가 아닐까? 출근길뿐 아니라 그날의 모든 것들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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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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