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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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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우스개 소리로 돌아다니던 이야기이다. 어느 대기업 중역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 그런데 사장의 이야기에 다들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게 아닌가. 보다 못한 사장이 한마디 했다.

“여러분들도 각자의 의견을 좀 내보세요.”

그러자 누군가 용기를 내서 말했단다.

“그런 애들은 과장 때 다 잘렸어요.”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마냥 허구라고는 못하겠다. 나도 한국에서 일할 때는 회의 시간에 가능하면 조용히 있으려고 했었으니까. 여기 미국 회사 분위기는 상당히 다르다. FaceBook에서 인턴을 했던 사람이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회의실에 있었던 경험을 쓴 글을 봤는데, 본인이 그 회의에서 별로 공헌을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이거였다.

‘인턴 주제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거기 있는 사람들은 네 의견 같은 걸 들으러 온 게 아니라고. CEO 얼굴을 그런 자리에서 볼 수 있었던 게 대단한 행운이었던 거지.’

그리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회사에서 내가 겪었던 회의 분위기, 거기서 있었던 이들이 떠올랐고, 잠시나마 이런 생각을 한 것이 부끄러웠다. 아무리 인턴이라도 마찬가지다. 그의 시간도 돈이다. 여러 사람들의 시간을 긁어모아 회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아주 비싼 이벤트인 게다. 이걸 굳이 하는 이유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지 다른 거 없다. 따라서 도움이 될 만하다면 인턴인지 아닌지 따지지 않고 모아오는 것이고, 일단 그 자리에 있다는 건 뭐라도 공헌하기를 기대 받는다는 뜻이다.

내가 저런 생각부터 들었던 까닭은 아직 여기 문화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실수도 많이 했다. 내가 뭐라도 도움이 될 줄 알고 데려왔는데, 입을 꾹 닫고 있어서 당황하던 사람들의 표정도 기억난다. 사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던 것이 이 얘기에 내가 감히 끼어도 될지 아닐지 감을 못 잡고 눈치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이메일을 쓸 때도 그랬다. 지금 열심히 왔다 갔다 하는 이메일 체인에 포함된 사람들 이름만 보고 주눅이 든 나머지 할 말 못한 적이 많다. 나중에 보스에게 ‘저 분들이 이러고 있는데 이건 아닌 거 같아요.’ 해서 문제를 바로잡거나, 참전을 시키거나 했었다.

그랬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젠 나도 적응 다 끝난 것 같다. 회의실에서는 아젠다를 잘 아는 사람이 최고지 다른 규칙 같은 건 없다. 나를 불러온 사람들은 내가 무슨 차이를 만들어 내길 기대하고 있다는 걸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거나 고개만 끄덕이고 있으면 오히려 실례다. 결론으로 이르는 길에 벽돌 한 장이라도 놓으려고 노력한다. 이견이 있다면 당당하게 드러내 놓는다. 어느 정도냐면 회의를 소집한 사람 앞에서 이 회의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말할 정도가 됐다.

한국에서 내가 몸담았던 조직, 그리고 거기서 했던 회의를 떠올려보면, 문제 해결이 최우선 과제가 아니었던 적이 많았다. 높으신 분들은 조직원들이 얼마나 자기 생각에 동의하는지를 알고 싶어했고, 자기가 얼마나 잘 이끌어가고 있는지 조직원들에게 확인받으려 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잘하고 있다는 소리는 나도 듣기 좋다. 누가 그걸 확인해주면 나도 힘이 난다. 그렇게 해서 윗분들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게 조직원의 최우선 목표가 아니었을까 싶었던 적이 많다. 사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이런 이유로 문제를 덮고 진행하다가 비극으로 끝나는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다. 어느 한국의 대기업 기획팀에서 일하던 친구가 사표를 던지면서 해준 이야기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무슨 사업을 하면 좋을지 연구하는 건 내 일이 아니야. 그건 비서실에서 내려오더라고. 그러면 우리는 이게 훌륭한 아이디어인 이유를 발굴해서 바치는 거지.”

윗분들 심기, 중요하지. 여기서도 중요하다. 그런데 이 동네에서는 문제를 해결하면 윗분들이 좋아한다.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있으면 별로 안 좋아하고 말이지. 빨리 퇴근하고 집에 가서 애들 숙제 봐줘야 되는데 내가 문제를 한 시간 일찍 해결하면 그만큼의 시간이 생기는 거니까 얼마나 좋겠나?

그러니 눈치를 볼 필요 없다. 일에 도움만 된다면 무엇이든 다 해야 되고, 그러라고 나를 불러낸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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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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