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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

위계 조직, 역할 조직

위계(Rank-Driven) 조직에서는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아랫사람들은 지시를 수행하기만 한다. 역할(Role-Driven) 조직은 구성원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그들은 그에 따른 재량을 갖고 본인이 생각하는 최선은 방법으로 일을 진행한다. 예를 들어 위계 조직에서는 “지름 1m, 깊이 1.5m의 구덩이를 특정 장소에 팔 것.” 이렇게 지시가 떨어진다면, 역할 조직에서는 주어지는 목표는 “저기 보이는 나무를 옮겨 심을 구덩이를 주차장 입구 옆에 만들 것” 이런 식이다.

한국에서 내가 겪은 조직들은 위계 조직에 가깝고, 여기서는 다 역할 조직이다. 이 한 가지가 내가 느낀 직장 문화 차이의 80% 정도는 설명하는 것 같다. 오해를 덜기 위해 밝히자면, 이 둘 중 어느 한 가지가 다른 것보다 우월하다고는 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서 좀 더 적합한 어프로치가 있을 뿐이다. 항상 100% 위계 조직처럼 움직이거나 그 반대인 경우도 드물다. 또 일을 잘하는 사람은 어느 환경에 데려다 놔도 대게 잘 해낸다. 그럼에도 내가 페이지를 할애한 이유는 내가 이 차이를 미리 알고 있었다면 조금은 더 빨리 적응을 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서열에 익숙하다. 뿌리 깊은 유교 문화와 군대 문화에서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조금이라도 나이가 많거나 계급이 높은 사람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고 모든 결정에서 우선권을 부여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진다. 반면 여기 미국에는 서열을 강제하는 문화가 없다. 한국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관습이 미국 애들에게는 신기한 것을 넘어 황당하게 느껴지는 게 한 둘이 아니다.

35살의 마크 저커버그가 평생 백수로 살아온 70살 먹은 노인을 만났다고 해보자. 한국식으로는 제 아무리 23살에 억만장자가 된 Facebook 창업자라도 이룬 것도 도전한 것도 없이 나이만 먹은 이 사람 앞에서 예의를 차리고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이 테크 그루가 배울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마땅히 그러는 게 한국에서 교양 있는 사람들의 처신이다. 미국 사람들에게는 이게 그냥 얼토당토않는 상황이다. 이런 문화적 차이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모이면 어지간하면 다 ‘Rank-Driven’ 조직이 된다. 미국 사람들은 자연스레 ‘Role-Driven’ 조직이 된다. 그나마 한국 사람들이 좀 유연하다 싶은 게, 한국 사람들이 역할 조직을 만들 순 있어도, 미국 사람들 모아놓고 위계 조직을 굴리기는 쉽지 않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주를 한다면 위계 조직에서 역할 조직으로 옮기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럼 이 변화는 수월할까?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S급 인재는 남들과 똑같이 곡괭이질을 해도, 능력이 넘치는 나머지, 여유가 있다. 또 그 여유를 커피 타임에 쓰지 않고, 이 일이 다른 일과 어떻게 연관이 되어 있는지 이해하려고 한다. 비록 본인에게 이 구덩이를 파도록 시킨 상사조차 이게 뭐에 쓰는 건지 모를 때가 많지만, 저 멀리 나무를 뽑으려 애쓰는 한 무리의 사람들, 또 여기까지 그 나무를 옮겨올 준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게 저 나무를 심을 구덩이라는 이해한다. 그러면서 1미터 아래에 음식물 쓰레기가 잔뜩 묻혀 있으니 구덩이를 다른 곳에 파야 한다는 판단까지도 한다. 그 판단이 윗선에 받아들여질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이 사람은 Rank-Driven 조직에서 이미 Role-Driven까지 아우르는 방식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이 정도 되는 사람은 즉시 자신의 100%를 발휘할 것이다.

헌데 이게 디게 어렵다. 일단 기본 능력치가 대단히 뛰어나야 하기 때문에,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은 여기서 떨어진다. 환경도 받쳐줘야 한다. 조직이란 대게 구성원의 에너지와 시간의 마지막 한 톨까지 짜내려 하니 여유가 없고, 아랫사람에게서 뭔가 다른 제안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상사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제 아무리 능력이 특출나도 위계 조직에서 일하며 역할 조직에서 필요한 역량을 키우기는 어렵다. 잘하는 사람은 환경이 바뀌어도 기본은 해내지만, 본인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한 것이다. 가끔은 위계조직 방식으로 할 때는 아주 잘하다가, 본인이 재량을 갖게 되자 제대로 망쳐 놓는 사람도 겪어봤다. 수습하느라 힘들었다. 결론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응기간을 갖고 조정을 해 나가야 한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한국에 있을 때, 방치인지 위임인지 모를 상황에 오래 있었으므로, Role-Driven에 가깝게 일을 했었다. 그 까닭에 조금은 수월하게 적응을 한 것 같다. 그래도 완전히 익숙해지는 데에는 1년 정도 걸렸다. 처음에는 너무 일이 단순하고 쉽다고 착각도 했다. 또 동료들은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이없는 실수도 많이 했을 거다. 뭐 별 수 있었겠나?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할 일은 그저 지시받은 것을 최선의 속도로 하는 게 아니라, 최선의 방법으로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래서 지시 자체가 단순했던 것이고, 다른 부분을 맡은 사람들과 자주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던 건데 그걸 몰랐다. 그 후로부터는 내 퍼포먼스가 조금은 더 나아진 것 같다. 처음부터 역할조직이 구성원에게 뭘 기대하는지 알고 있었다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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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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