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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

여기도 회식이 있다

누가 그랬냐? 미국 회사에 회식이 없다고. Not surprisingly, 여기도 회식이 있다. 그런데 따로 챕터를 구성해야 할 만큼 이 회식이 중요한가 하면, 아마도 그렇지 않을 거다. 한국에서처럼 참석에 대한 압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잘 쳐줘야 직장생활의 양념 정도이니 그냥 없는 셈 치고 살아도 된다. 허나 굳이 회식, 혹은 회사 이벤트에 대해서 쓰는 이유는 재미가 있어서다. 매번의 이벤트가 난 꽤 재밌었다. 한국과도 상당히 다르기도 했고.

시카고 컵스 경기장에서 열린 이벤트 갔다가 TV에 나오기도 했었고, 볼링장에서 놀 때도 재밌는 일 많았다. 하지만 회식의 왕이자 직장생활의 꽃은 바로 Year End Party다. 미국 회식에 대해서 얘길 하려면 바로 요놈을 끄집어내야 한다. 오늘은 이 연말파티에 처음으로 참석했을 때 일을 더듬어봤다.

초대장에는 특급 호텔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이 파티에 대해서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몰랐다.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브루스 웨인과 미란다 테이트가 처음 만나던 장면처럼 화려한 파티일까? 그래도 회사 모임인데 이걸 예상하는 건 좀 무리겠다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한국에서 겪은, 1차를 소주로 시작해서 일부 살아남은 사람들과 높으신 분들만 양주를 따러 가는 망년회를 기대해야 할까? 지구 어딘가에서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니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것보다는 고급이어야 정상이겠지. 진실은 이 둘 사이 어디쯤 있으리라.

일 한지 갓 6개월을 채운 주제에 회사 행사에 늦는다는 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30분 일찍 도착했다. 그런데 뭐야 이 어수선한 분위기는? 여기 오는 동안 해왔던 공상이 다 무색하게도, 잘못 찾아온 모양이다. 날 쫓아내지는 않았지만, 일하는 사람들만 돌아다니는 가운데 혼자 차려 입고 서 있는 모습이 여간 을씨년스럽지 않았다.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런데 얼씨구, 저 녀석은 나보다도 늦게 입사한 신입 아닌가. 동행이 있는 게 덜 쪽팔리긴 하지만 큰 위로는 안되었다. 신입 둘이서 불안함에 떨고 있었는데 파티 시작 시간이 넘어서니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다. 브런치 약속을 해도 십 분 늦게 오는 사람도 드문데, 회사 연말파티는 제 시간에 온 사람이 나 포함해서 딱 두 명이라니 참 이상하도다.

음식과 술이 세팅 되고, 사람도 채워졌다. 분위기가 달아올랐고, 내가 처음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도 알 수 있었다. 여기는 말이지, 브루스 웨인이 걸어 들어온다 해도 위화감이 없을 거다. 조커가 따라 난입한다면 꽤 놀라겠지만 말이야. 그만큼 호화로웠다. 음식도 훌륭했다. 소고기 스테이크에 여기서는 비싼 굴, 새우 등등 해산물이 무한정 나왔다. 거기다 고급 와인도 쫙 깔려 있었다. 이 모든 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여자들의 경우에는 모두 이브닝 드레스를 갖춰 입고 왔다. 내가 남자라 정장에 보타이만 매도 튀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전형적인 포멀한 파티인 것이다.

시카고의 금융업계뿐만 아니라 미국 회사들은 연말파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아는 다른 회사들도 고급 호텔이나 박물관 등을 빌려서 연말을 장식한다. 실리콘벨리의 테크 기업들도 이 행사에 돈을 많이 쓰기로 유명하다. 게다가 일하는 사람들도 이건 중요한 이벤트로 여긴다. 몇 달 전부터 드레스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흔할 정도니까. 비슷한 형식의 포멀한 파티는 학교에서도 한다고 하니 이 동네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전통인 모양이다.

이런 파티에는, 규모가 꽤 큰데도 불구하고, 사회자가 없다. 다 같이 모여서 팀별 장기자랑을 본다 거나 그런 거 없다. 그냥 음식, 술, 그리고 음악이 있으니 알아서 놀라는 거지. 또 앉을 곳도 별로 없다. 한국에서라면 인원수대로 의자가 갖춰져 있지 않으면 사람들이 화를 낼 텐데. 다들 계속 돌아다니면서 아무나 붙잡고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낸다. 유학 시절에 미국인들이 연 파티에 몇 번 갔었는데 다 이런 식으로 놀더니 그게 걔네들이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던 거다.

파티가 무르익어가면 DJ가 음악을 틀고, 사람들이 하나 둘 댄스 플로워에 올라간다. 직장 동료들, 특히 상사가 보는 데서 춤을 춘 다는게 어색해서 난 디저트 테이블로 직행했다. 내 옆자리 동료 K도 awkward situation이라며 끝끝내 댄스 플로워에만은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만 이런 것도 아니다. 헌데, 우리 두 엔지니어가 업계 표준은 아닌 게 확실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서 흥겹게 놀더라. 가끔 놀랄 만큼 잘 추는 사람들도 있고 말이지. 나도 첫해에만 이랬지 이젠 별로 거리낌이 없다. ‘강남 스타일’이 히트 친 이후로는 매년 이 한국 노래가 울려 퍼진 통에 떠밀려 올라간 적도 여러 번이고 말이지.

댄스 타임이 끝나면 이 파티도 막을 내린다. 집이 가까운 사람들은 집에 가고, 먼 사람들은 호텔방으로 간다. 들뜬 분위기가 못내 아쉬운 사람들은 근처 클럽으로 발을 옮긴다. 마지막이 너무 깔끔한 데 놀랐다. 한국에서 회식이 끝날 때를 생각해보면 말이지, 여기저기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누는 사람들이 있고, 길에도 무슨 지뢰 마냥 토사물이 널브러져 있는 게 예사였는데. 회사 이벤트가 아니라도 술 마시러는 많이 가봤는데 미국에서는 그런 추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가볍고 깔끔하게 즐기는 게 이 동네 스타일인 모양이다.

아니 그런 거 본 적이 한번 있네. 안타깝게도 주인공은 내 아내다. 어느 해 연말파티에서 조금 과음하는가 싶긴 했다. 집으로 돌아와 씻고 잠까지 들었는데, 갑자기 일어나서 입을 막고 화장실로 뛰어가는 게 아닌가. 따라가봤더니 변기를 향해 토하기는 했는데 하필이면 변기 뚜껑이 닫혀 있었네. 아이고 애석해라.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니, 내가 그날 파티에 가기 전에 아끼는 운동화를 정성껏 빨아다가 변기 뚜껑 위에 말려 놓았던 게지. 토사물을 뒤집어쓴 뉴발란스 런닝화를 살려보려고 모든 것을 다 해봤으나 결국 뭐 안되더라. 아내는 아직도 이 일을 미안하게 생각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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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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