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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

회자정리(會者定離)

회사 생활을 한두해한 것도 아닌데, 아직까지 힘이 든다. 정들었던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 말이다. 일을 시작한지 일 년이 좀 못 된 어느 날이었다. J가 시카고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알려왔다. 그와는 내가 처음으로 맡은 중요한 프로젝트를 같이 했었다. 그동안 정도 많이 들었고 무엇보다 난 그 애가 좋았다.

그는 차분해 보이는 눈빛에 참 온화한 성품을 가졌다. 가끔 버스 정류장에서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같이 일할 때면 내 엉터리 영어를 잘 견뎌주고, 내 서투른 일처리를 이해해주어서 너무나 고마웠다.

참 이상하지. 왠지 얘가 곧 떠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참 이상하지. 사람의 느낌이란. 그리고 그날 이메일을 받았을 때 직감적으로 알았다. 내용을 보지 않았어도 말이다. 언젠가 홈타운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었는데 그대로 되었다. 놀러 오면 꼭 연락하란다. 가서 꼭 점심이라도 같이 먹으며 그동안 못 들은 이야기를 들어보겠다고 다짐했다.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난다. 여러 감정이 밀려왔다. 그 중 압도적인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더 친하게 지내지 못한 것이 아쉬웠고 그런 채로 떠나보내서 또 아쉬웠다. 거자필반이라니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으로 믿으며 날 위로했다. 직접 연락을 준 것이, 그렇게 해서 작별인사를 전할 기회가 있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한국에서 일을 할 때도 정든 동료가 떠나는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이 사람과 멀어진다는 생각은 좀 덜 들었다. 회사를 옮겨봐야 다 서울 근처였으니까. 진학을 해도 그렇고 말이지. 유학을 가는 게 아닌 이상, 친했던 동료들은 얼굴을 자주 봤다. 그런데 여긴 시카고의 다른 회사로 옮겨가는 사람이 반도 안된다.

뉴욕, 보스턴은 말할 것도 없고, 캘리포니아 산호세, 밴쿠버, 북아메리카 대륙 방방곡곡은 물론이고 아내도 좋아하던 친구들 몇은 영국 런던과 싱가폴로 떠났다. 점잔 빼지 않겠다. 이들이 떠날 때마다 큰 상실감을 느꼈다. 아무래도 이곳 친구가 많지 않은 탓도 있겠지. 그렇게 떠난 친구들과 계속 연락을 하고 다시 만나기도 했다. 허나 인연의 끈은 희미해지기 마련이고, 다시 본 적도 없는 이들도 있다. 누군가 이직을 하면 나도 무언가를 잃었다.

좋은 점도 있긴 하다. 난 시카고에 계속 머물러 있었을 뿐인데, 어지간한 곳에 가면 다 만날 친구들이 있다. 런던으로 휴가를 갔을 때는 친구 집에 머물렀는데, 마침 그의 생일이 껴 있었다. 집에 사람들을 불러왔고 파티가 통제불능이 되더니 새벽까지 광란의 밤을 보냈다. 재밌게 놀고 있다고 소문이 났는지 무슨 친구의 친구까지 몰려오더라. 시차 적응도 안된 터라 몸은 피곤했지만, 이건 그 휴가에서 최고의 순간이었다. 단조롭게 관광지에서 사진이나 찍고 돌아갈 뻔했는데, 그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고 친구를 사귈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여행가서 만난 옛 친구가 반갑고, 그들과 시간을 보내는 건 즐거운 일이다. 허나 이것마저도 그들이 떠남으로써 잃은 것과 비교되지 않는다. 매주 새로운 레스토랑을 발굴해서 브런치 모임을 주도하던 친구가 떠나자 모임 자체가 흐지부지되는 일도 있었고, 새로운 사람들과 알게 되고 천천히 친해지더라도 빈자리가 완벽하게 채워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냥 헤어짐과 새로운 만남에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아마도 ‘피터 드러커’였던 것 같다. 21세기 지식 노동자들의 삶은 유목민과 같다고 했다. 한국에서조차 평생 직장은 신화가 되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나도 이 직장에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한 도시를 고향으로 알고 성장했으면 해서 미시건 호숫가를 떠나지 않으려고는 하는데, 장담할 수는 없다. 지켜야 할 땅이 있는 농부도 아니고 말이지. 그냥 이게 내 삶의 일부인 것이다.

현대인, 그리고 지식 노동자란 참 불안정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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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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