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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

시카고의 심장, 금융 산업

딱딱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지도를 펴보자. 시카고는 미국 중서부의 미시건호 옆에 자리하고 있다. 한쪽으로는 호수를 끼고 있고, 다른 방향으로는 평원이 뻗어 있다. 꼭 심시티를 해보지 않아도, 교통의 요지가 되기 아주 좋은 위치라는 걸 알 수 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뱃길과 철도가 많은 사람들을 날라 왔고, 곡물을 비롯한 물자도 모였다. 이곳에 거래소가 생긴 것은 필연이라고 하겠다.

Chicago Board of Trade (CBOT)는 1848년에 설립되었다. 이어서, Chicago Mercantile Exchange (CME)가 1898년에 시작되었다. 이름만 들으면 물자가 직접 거래되는 시장 같은 느낌이 들지만, 이들 거래소에 가도 옥수수나 철강 같은 상품을 직접 볼 수는 없다. 그들에 대한 선도 거래가 거래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거래소에 올려놓은 선도 거래를 선물이라고 한다. 이 선물은 흙 냄새 같은 건 전혀 나지 않는 완전한 금융 상품이다. 이들 거래소를 중심으로 시카고에 금융 산업이 번창하게 된다. 참고로 CME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의 이름은 ‘Chicago Butter and Egg Board’였다고 한다. 지금은 날씨까지 거래되는 걸 생각해보면 참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시카고 전체 근로자 수 대비 종사자들을 보면 금융 산업은 고작 6-7%를 갖고 있을 뿐이다. 내 스킬 셋에 맞는 직장은 찾아볼 수 없는 LA도 금융, 보험 종사자들 비율이 4%는 되니까 별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다운타운으로 한정해보면 이 통계가 많이 달라질 거라 믿는다. 과장 조금 보태면, 특히 중심가인 La Salle 거리 근처에 있는 회사들은 반은 금융, 나머지 반은 로펌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금융 산업에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냥 스노우 보드 동호회에만 가도 트레이딩펌, 헤지펀드나 은행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건 한국에 있을 때는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서울에도 금융기관 본사는 다 모여 있지만, 펀드 매니저나 퀀트 데스크에서 일하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기란 쉽지 않으니까.

손만 뻗으면 내가 들어가고 싶어하는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다는 건 무시못할 장점이다. 그렇게 알게 된 사람들이 내게 모의 인터뷰를 해주기도 했고, 인더스트리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얘기를 해줬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좀 심심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큰 도움이 되었다. 나 같은 사람이 잘못된 기대를 안고 미국으로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농담삼아 하는 이야기로 MBA만 졸업하면 골드만삭스에서 투자은행 일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는 말도 자주 듣는다. 구체적으로 어느 직능에서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그 빈 공간을 희망사항으로 채워 놓고 사는 사람들을 쉽게 본다. 그걸 털어내고 현실적인 목표, 자신의 장점이 발휘될 수 있는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실제로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날 수 있다면, 이 과제를 수월하게 해낼 수 있다. 간혹 지나치게 운이 좋은 사람들 중에서는 직접 고용을 해주거나, 인터뷰를 볼 수 있게 주선을 해주는 사례도 있다.

직장을 구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이미 종사하고 있는 산업의 구성원들이 밀도 있게 모여 있다는 데서 얻을 게 많다. 미국 사회에서도 인맥은 중요하다. 단순히 같은 학교, 같은 지방 출신이라고 도움을 주는 경우는 드물지만, 내가 역량만 있어 보이면 기꺼이 추천을 해주고, 그런 추천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정말 크다. 꼭 커리어의 디딤돌로 쓰지 않더라도, 업계 소식에 귀를 열어놓고 사는 것이 내 가치를 유지하기에 유리하다. 그런데 비슷한 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흔하게 마주치다 보니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이게 된다. 물론 만나서 하는 대부분의 대화는, 무모한 배팅을 하다가 망한 트레이딩펌 같은, 가십이겠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적인 친밀감도 쌓을 수 있고, 가끔 영양가 있는 이야기도 듣는다. 과장 좀 하자면 실화를 다룬 영화 ‘Big Short’의 등장인물 중 하나도 친구들과 잡담하다 들은 걸 이용해서 큰 돈을 벌었다.

이 장점들은 내가 시카고에 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다. 아마 뉴욕으로 갔었어도 비슷하거나 더 나았겠지. 다만, ‘Big Short’의 주요 인물인 호켓처럼, 시골에 은둔해 있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나에게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렇게 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여기 사람들은 참으로 열려 있다. 본인들보다 영양가가 좀 없어 보이거나 영어가 서툴면 배척당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기 쉽고 실제로 나도 그랬다. 그러나 실제로 만나본 사람들은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의심과 걱정은 좀 내려놓고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렸다면, 내가 여기 정착하기가 조금은 더 쉬워지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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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공돌이 선배들의 해외생활 이야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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